덕숭을 안자 뇌성벽력이… 손에는 버선 한 짝만

     

마상에서 멀어져가는 여인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왔으나 들떠있는 수덕의 가슴은 진정되지를 않았습니다. 책을 펼쳐도 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습니다. 눈에 어리는 것은 여인의 모습 뿐. 수덕은 할 수 없이 할아범을 시켜 그 여인의 행방을 알아오도록 하였습니다.

그 순간 신방도, 덕숭 낭자도, 세속의 탐욕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수덕은 그제야 알았습니다. 덕숭 낭자가 관음보살님의 화신임을. 그리하여 수덕은 절 이름을 수덕사라 칭하고 수덕사가 있는 산을 덕숭산이라 했습니다. 지금도 수덕사 인근 바위틈에서는 해마다 좥버선꽃좦이 피며 이 꽃은 관음의 버선이라 전해 오고 있습니다.

밤새 내린 눈이 온 산하를 하얗게 덮은 새해 아침.

쨍쨍 해님은 밝은데 수정처럼 맑은 은송이 눈발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습니다.

예산의 어느 숲속이 소란스러웠습니다.

“우와, 우와아!”

“도련님, 어서 활시위를 당기십시오.”

옆에서 사냥 시중을 들던 할아범이 숨이 턱에 차도록 채근을 하는데 과연 귀를 쫑긋 세운 노루 한 마리가 저쪽 숲 속에서 오고 있었습니다.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고 화살이 막 튕겨지려는 순간 수덕도령은 말없이 눈웃음을 치며 활을 거두었습니다.

“아니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노루몰이를 하느라 진땀을 뺀 하인들은 활을 당기기만 하면 노루를 잡을 판이기에 못내 섭섭해 했습니다.

“너희들 눈에는 노루만 보이느냐? 그 옆의 사람은 보이지 않느냐?”

“이 산골짜기에 저런 처녀가?”

하인들은 모두 의아해 했습니다.

“도련님, 눈이 부시도록 아리땁습니다. 노루 대신 저 여인을… 헤헤.”

“에끼 이 녀석, 무슨 말버릇이 그리 방자하냐. 더구나 오늘이 새해 첫 아침인데. 자 어서들 돌아가자!”

수덕은 체통을 차리려는 듯 일부러 호통을 치고 갈 길을 재촉했으나 가슴은 뛰고 있었습니다. 노루 사냥이 절정에 달했을 때 홀연히 나타난 여인, 어쩜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도령의 가슴은 더욱 뭉클했습니다.

“차라리 만나나 볼 것을…”

양반의 법도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이랴!”

마상에서 멀어져가는 여인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왔으나 들떠있는 수덕의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책을 펼쳐도 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습니다. 눈에 어리는 것은 여인의 모습 뿐. 수덕은 할 수 없이 할아범을 시켜 그 여인의 행방을 알아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렇지요. 도련님이 아무리 법도에 뛰어나다 해도, 도련님도 기세 출중한 청년인 걸요. 제가 곧바로 그 낭자의 처소를 알아보겠습니다.”

할아범은 다음 날 그 여인이 누구이며 어디 사는가를 수소문해 왔습니다. 그녀는 바로 건넛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 낭자였습니다. 아름답고 덕스러울 뿐 아니라 예의범절과 문장이 출중하여 마을 젊은이들이 줄지어 혼담을 건네고 있으나 어인 일인지 모두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어째서 그토록 아름다운 낭자가 혼자 살까?”

수덕의 가슴엔 불이 붙었습니다. 의당 글 읽기에 소홀하게 된 수덕은 훈장의 눈을 피해 매일 처녀의 집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그러나 먼 발치로 스치는 모습만을 바라볼 뿐 낭자를 만날 길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밤. 가슴을 태우던 수덕은 용기를 내어 낭자의 집으로 찾아 들었습니다.

“덕숭 낭자, 예가 아닌 줄 아오나….”

“지체 높은 도련님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낭자! 나는 그대로 인하여 책을 놓은 지 벌써 두 달, 대장부 결단을 받아주오.”

“......?”

두 볼이 유난히 붉어진 낭자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일찍이 비명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고혼을 위로하도록 집 근처에 큰 절 하나를 세워 주시면 혼인을 승낙하겠습니다.”

“염려 마오. 내 곧 착수하리다.”

마음이 바쁜 수덕은 부모님 반대도,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상관치 않고 불사에 전념했습니다. 기둥을 가다듬고 기와를 구웠습니다. 이윽고 뚝딱 한 달 만에 절이 완성됐습니다. 수덕은 한걸음에 낭자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제 막 단청이 끝났소. 자 어서 절 구경을 갑시다.”

“구경을 아니하여도 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 무엇을 다 안단 말이오?”

그 때였습니다.

“도련님 저 불길을….”

절에서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절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였는데...수덕은 흐느끼며 부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덕숭 낭자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수덕도령을 위로했습니다.

“한 여인을 탐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일념으로 부처님을 염하면서 절을 다시 지으십시오.”

수덕은 결심을 새롭게 하고 다시 불사를 시작했습니다. 매일 저녁 목욕재계하면서 기도를 했으나 이따금씩 덕숭 낭자의 얼굴이 떠오름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일손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절을 완성할 무렵 또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아, 아!”

“부처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수덕은 이를 악물었습니다. 자꾸만 떠오르는 덕숭 낭자의 얼굴을 지워버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오로지 절을 짓는 데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시 또 한 달.

그즈음 수덕의 얼굴은 이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 늠름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마르고 창백한 얼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신비롭기 그지없는 웅장한 대웅전이 완성됐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수덕은 흡족한 마음으로 합장을 했습니다.

“도련님, 소녀의 소원을 풀어주셔서 그 은혜 백골난망이옵니다. 이 미천한 소녀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마침내 신방이 꾸며졌습니다. 촛불은 은밀한데 낭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부부간이지만 잠자리만은 따로 해주세요.”

“......?”

이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수덕은 덕숭을 덥석 안았습니다. 순간 뇌성벽력과 함께 돌풍이 일면서 낭자의 모습은 문밖으로 사라졌고 수덕의 두 손에는 버선 한 짝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버선을 들여다보는 순간 눈앞에는 큼직한 바위와 그 바위 틈새에 낭자의 버선 같은 하얀 꽃이 피어있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신방도, 덕숭 낭자도, 세속의 탐욕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수덕은 그제야 알았습니다. 덕숭 낭자가 관음보살님의 화신임을. 그리하여 수덕은 절 이름을 수덕사라 칭하고 수덕사가 있는 산을 덕숭산이라 했습니다. 지금도 수덕사 인근 바위틈에서는 해마다 좥버선꽃좦이 피며 이 꽃은 관음의 버선이라 전해 오고 있습니다.

전설이 전설을 낳은 곳.

수덕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창건 설화입니다. 4월에 피는 골담초가 바로 버선꽃입니다. 그러나 그 버선꽃이 진달래면 어떻고, 개나리면 또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그 모든 신화 전설은 우리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2015년 을미년 양띠 해가 밝았습니다. ‘을(乙)’의 색이 청(靑)이므로 ‘파란 양(靑羊)의 해’입니다. 2014년 갑오년(甲午年) 청말띠의 해에 이어 2015년 을미년(乙未年)도 청양띠의 해입니다.

양은 성격이 착하고 유순하며 무리를 지어 살면서 화목하고 평화롭게 사는 동물입니다. 특히 사회성이 뛰어나 공동체 내에서 잘 융합합니다. 지난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공동체의 선(善)입니다. 모쪼록 2015년은 청양 같은 한 해, 또한 우리 모두 행복한 청양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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