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천문대”설 오랜 논란
석가족 후예 강조한 상징물 주장
‘마야부인 옆구리로 낳은 여왕’


신라 최초의 여성 지도자였던 제27대 선덕여왕은 어떤 왕이었으며 그녀가 건조한 첨성대는 무슨 용도였을까?

그녀는 정변으로 왕위를 차지하지도 않았고, 허수아비 왕도 아니었다. 정통으로 왕위를 계승했고 실권을 행사했다. 여왕은 즉위 후 성조황고(聖祖皇姑, 성스러운 조상을 둔 여황제)라는 존호를 받았고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썼다. 자주국가의 군주였다.

그런 정통성과 타고난 지혜로 여왕은 내우외환을 극복하고 김춘추ㆍ김유신과 같은 걸출한 인물들을 기용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여왕은 인정을 베풀고 첨성대, 분황사, 영묘사 등을 건설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자장율사의 건의로 건설한 황룡사 9층탑은 중국, 일본 등을 포함한 아홉 나라를 신라에 복속시키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분황사와 영묘사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황제의 사찰로 지었다. 그럼 첨성대는 무엇이었나? 아쉽게도 그에 관한 정보는 건조 650년 후 〈삼국유사〉에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전부다.

첨성대가 천문대로 알려진 것은 1904년 대한제국 때 일본 동양건축 사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천문관측소일 것이라고 발표한 후부터다. 그러나 첨성대는 관측공간이 좁고 불편하며 방향도 맞지 않아 천문대에 어울리지 않은 게 많다.

따라서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설을 놓고 논란이 계속되었다. 1964년에 그림자로 절기와 시간을 관측하기 위한 규표(圭表)
라는 설이 제기되었고 1970년대에는 천문대의 부속건물이라는 설과 수미산을 본 뜬 제단이라는 설이 제시되었다. 그러다가 1998년 조세환이 우물(井)설을 제시하고 김기홍이 우주우물로 해석하면서 역사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둥근 몸통과 맨 위 2단의 정자석(井字石)을 다시 보니 땅 위의 우물이었다.

그 후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와 관련된 지상의 우물 나정(蘿井)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또한 한반도에는 위인의 탄생과 연관되어 별을 쳐다보는 첨성대가 여러 개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첨성대 기단 아래 부분이 부풀어 있는 점, 어울리지 않는 위치에 창문이 난 점, 그리고 구조물이 정남북으로 놓이지 않고 16도 기울어진 점 등은 여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2009년 정연석 교수의 논문이 이런 의문을 풀 힌트를 주었다. 그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받은 ‘성스러운 조상을 둔 여황제’라는 존호는 박혁거세와 석가모니의 두 가지 성스러운 혈통이라는 뜻이다. 당시 신라 왕실은 석가족의 후예임을 자처하였다. 그래서 왕의 이름도 부처님의 아버지 정반왕을 뜻하는 백정이었고 왕비의 이름도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였다.

선덕여왕은 박혁거세의 혈통과 함께 석가족의 혈통을 잇고 별의 계시로 신라에 태어난 부처였다. 경주 첨성대는 바로 이를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는 것이다. 부처는 마야부인의 옆구리로 낳았다니까 왕궁 옆을 지나면서 마야부인이 옆구리로 여왕을 낳는 상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한다. 첨성대는 아래는 불록하고 옆구리에 구멍이 뚫렸으며 왕궁 쪽에서 옆구리가 보이도록 16도 각도로 구조물을 틀어서 지었다는 것이다.

태종무열왕부터 진골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자 선덕여왕의 성골신화는 오랜 세월망각 속에 묻혔고 기록도 한정됐다. 첨성대가 별과 연결된 지상 우물이며 선덕여왕의 위대성을 선포한 상징물이었다는 주장이 이제야 나오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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