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조상서가 자복화상(資福和尙)을 만나러 왔다. 자복화상이 진조가 오는 것을 보자마자 손가락으로 공중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진조는 “저는 이미 와서 있는데 어찌하여 번거롭게 일원상을 그리십니까?”하고 말했다. 자복화상은 방문을 쾅하고 닫아 버렸다.

〈벽암록〉제33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진조는 절강성 엄주부의 상서로 있던 재가자로 임제의현의 선배인 목주도감의 법제자입니다. 자복화상은 위앙종 앙산 혜적의 법손(法孫)입니다. 당시 진조상서가 연배이며 선력(禪歷)도 더 오래됐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둘의 대화는 무르익은 선수들끼리의 ‘놀이’를 보여줍니다. 자복화상이 보여주려 한 일원상의 진리에 이미 와 있는데 번거롭게 왜 그려 보이느냐는 진조의 응수입니다. 그러자 자복화상은 문을 쾅 닫음으로써 진조의 말을 수긍합니다.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사람끼리 무슨 대화가 더 이상 필요 하느냐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 중 서로 교감하는 대화가 으뜸이겠지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도반이 있다면 그는 실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진심으로 나누는 대화이기 때문에 기교나 수식이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기교와 수식이 들어가는 말 자체가 번거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말은 간단명료하나 눈빛만 보고 무엇을 말하는지 그 의미를 서로가 파악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기에서 ‘놀이’가 만들어집니다. 대화의 주제를 이미 서로가 간파한 마당에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데 그렇다고 침묵을 지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놀이는 이래서 묘한 재미와 긴장감을 안고 자연스레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놀이는 경우에 따라 날 선 설전이 되기도 해 다른 사람이 볼 때 싸우는 걸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부부생활 40~50년이 되면 굳이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지 않는, 즉 눈빛으로 대화가 가능한 사이입니다. 투박하게 단답형으로 대화하지만 그 말 속에는 사업하는 자식을 어떻게 도울 것인지, 외양간의 소가 설사병이 났는데 무엇을 잘못 먹여 그랬는지 다 들어 있습니다. 이미 부부는 어떤 해결책을 갖고 있는지 가슴으로 공유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정작 바깥사람이 보고 있노라면 정분이 떨어져 싸우는 소리로 곡해해 듣습니다. 중재한다고 어정쩡하게 나섰다가 괜히 면박 받기 일쑤입니다.

물론 이 같은 경지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 부부만이 가질 수 있는 이러한 경지를 아무하고 또 아무 데서나 누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대화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즉, 어떻게 대화를 주고받느냐에 따라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을 자초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말하는 동물’로서 대화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수단입니다. 중요한 것은 대화를 순전히 자기 입장에서만 내뱉는 배설의 기능으로만 이용해서는 곤란합니다. 말 한마디에 상처 받고 한 마디 말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려는 사람은 말의 기능을 특별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대화를 할 때 ‘여유’를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유가 없으므로 빨리 결론을 내고 대화를 끝내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깊이 기억하지 않습니다. 단지 ‘스쳐 지나가는 사람’으로만 여길 뿐입니다.

대화에 여유를 가져보십시오. 상대방과 편안한 마음으로 이 시간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고 여유를 갖는다면 말은 상처가 되고 긴장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만의 놀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 느낄 수 있습니다.

대화의 여유로움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시간의 활용입니다. 어느 누구를 만나든 내 말의 여유로움에서 상대방이 친숙하고 편안한 마음을 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대인관계에서 만족스러움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대화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글로벌 기업 리더들에게 일종의 대화법(커뮤니케이션)을 자문해 온 주디스 E. 글레이저는 ‘대화지능(Conversation Intelligence)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주디스는 짧게 몇 마디 주고 받는 대화가 우리의 삶을 순식간에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넌 절대 못해”, “네가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해?” 등의 말이 돈독하게 쌓아온 관계를 일시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대화는 단순한 정보전달을 위한 1단계, 관점이나 생각을 전달하고 설득하는 2단계, 함께 현실을 변화시키고 창조해가는 3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우리가 대화를 3단계로 끌어 올릴 때 인간관계의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주디스의 의견입니다. ‘대화지능’이란 바로 이러한 대화의 도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충분한 연습과 실전을 통해 단계를 높여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생활의 기본은 대화에서 시작됩니다. 사회에서의 소통이란 다름 아닌 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앞의 벽암록에 나오는 선사들의 예처럼 촌철살인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서로 교감하고 이해하는 대화법을 구사한다면 보다 건강하고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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