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못보던 모친 치유 … 스님 눈도 저절로 떠져

 

혜안 스님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런 소원이 없습니다. 다만 다시 보문암으로 내려가 불쌍한 병자들을 돌보겠습니다.”

임금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도울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혜안 스님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임금님께서 저를 도와주시는 것은 이 나라에서 불쌍하고 병든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임금님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임금님은 자신이 직접 쓴 증표, 즉 어의패를 들고 대신을 불렀습니다.

“그대는 해마다 쌀 오백 섬을 보문암에 내리고, 이 증표를 내어 보이면 어떤 관원이고 스님의 청을 거역하지 못하게 하라.”

마침내 스님은 대궐을 떠나 보문암으로 향했습니다. 물론 스님을 호위하는 군사들이 대동하였지요. 그런데 천병산 보문암을 두 고을 앞두었을 때 행렬 앞에서 한 여인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인은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앞 못 보는 불쌍한 여인입니다. 부디 누가 제 딸을 찾아 주십시오. 제 딸을 찾아 주십시오!”

호위하는 군사가 여인을 꾸짖어 물리치려고 했으나 여인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스님이 군사들을 물렸습니다.

“잠깐, 저 여인을 데려와 주시오.”

곧바로 여인이 스님의 앞에 인도되었습니다.

여인은 장님이었습니다.

스님은 조용히 물었습니다.

“무슨 사연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다시 울면서 애원했습니다.

“저는 죄 많은 여인입니다. 남편을 잃고 눈이 멀어 어린 딸을 지팡이 삼아서 유리걸식하다가 오늘 이 근처에서 어떤 자에게 딸을 빼앗겼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 자가 누군지는 아시오?”

“이 고을 관속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우선 그 여인을 고을의 숙소로 데려 가게 하였습니다. 마중 나온 사또가 이 사실을 알고 안절부절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그는 여인을 얼른 객사에 쉬게 하고 아전들을 다그쳤습니다.

“저 스님이 어떤 분인지 아느냐? 잘못하면 내 목이 달아나게 생겼다. 누가 저 여인의 딸을 무도하게 취하였느냐?”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사또는 곧바로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관내의 모든 관속들을 모조리 형틀에 올려 매라!”

그러자 한 군노가 벌벌 떨면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사또는 당장 그 군노를 옥에 가두고 여인의 딸을 데려왔습니다. 사또는 스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스님, 저의 허물을 용서해주시지요. 제가 고을 관속들을 단속하지 못한 죄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지금 당장 범인의 목을 치겠습니다.”

스님은 빙긋 웃었습니다.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사람은 찾았고 범인은 자백하였으니, 잘 타일러서 석방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또가 다시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스님의 인자하신 뜻을 받들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사또는 죄를 저지른 군노에게 무섭게 명령했습니다.

“내 너를 당장 처형할 것이지만 인자하신 스님의 분부로 석방해 주는 것이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렸다!”

“거룩하신 스님, 두 번 다시 죄를 짓지 않고 살겠습니다.”

군노는 눈물을 흘리면서 수없이 절을 하고 물러갔습니다. 딸을 찾은 여인은 감격하여 합장하고 울면서 스님의 은덕을 고마워했습니다. 스님은 여인과 딸을 조용한 숙소에 데리고 갔습니다. 셋이 자리에 앉자 여인이 스님의 손을 잡으며 한탄을 했습니다.

“스님은 어느 절에 계십니까?”

“예, 저는 천병산 보문암에 있습니다.”

“성씨는 누구신지요?”

“저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안계십니다.”

“부모님은......?”

“철감대사께서 강보에 싸여 개천가 바위 위에 버려진 저를 데려다 기르셨으니 성도 모릅니다.”

여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그럼, 지금 스님의 연세는 얼마이십니까?”

“열아홉입니다.”

혹시나 하던 여인은 이제 더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내 아들아!”

여인은 스님에게 왈칵 달려들어 얼싸안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스님도 무언가 어렴풋 짐작이 갔습니다. 스님은 바로 말했습니다.

“지난 일을 슬퍼하실 것은 없습니다. 떳떳하게 자식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모두가 인연입니다. 피할 수 없는 업보입니다.”

그날 밤 스님은 어머니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세 사람은 얼싸안고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그렇게 자정이 지나자 문득 스님의 눈도 검은 안개가 깨끗이 걷혔습니다. 세 사람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부처님의 뜻에 감사하며 스님은 〈법화경〉을 독송하고 모녀는 관세음보살을 염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눈을 감고 천천히 그동안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스물세 살에 어머니와 결혼한 스님의 아버지 남씨는 부농의 아들인데, 몸이 허약한데다가 과거 공부에 너무 애를 써서 결혼한 지 4년 만에 스님을 유복자로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아 기르며 홀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했으나 남편을 잡아먹었다고 트집을 잡아 못살게 구는 시어머니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몇 번을 죽을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 무렵 이웃에 사는 문 씨라는 청년이 넌지시 동정하여 마침내 어느 날 밤 두 사람은 무작정 집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유랑하다가 어느 집 헛간에서 몸을 풀었습니다. 갓난아이는 장님이었습니다.

천병산 기슭, 그들은 지칠 대로 지쳐서 이제 한 발자국도 옮길 기력이 없었습니다. 하여 시냇가의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날은 저물어 갔습니다. 마침내 문 씨는 눈먼 아이를 버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옥신각신 싸우다가 어머니가 졌습니다. 두 사람은 아이를 뉘어두고 힘없이 발길을 옮겨 놓았습니다. 얼마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버리고 온 아이가 눈앞에 아른거려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발길을 돌이켰습니다. 그런데 쉬던 자리에 이르러보니 아이가 간 곳이 없었습니다. 필시 산짐승이 물어간 것이라 생각하자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그 근처를 수없이 헤맸으나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천병산에서 사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며칠을 북으로 북으로 도망치듯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러다가 한 곳에 이르러 어느 부농의 고용인이 되었습니다. 문 씨는 머슴살이, 어머니는 식모가 되었습니다. 그 때 딸 정화가 태어났습니다.

두 사람은 5~6년을 부지런히 일하여 조그만 집도 장만하고 논도 몇 마지기 손에 넣었습니다. 이제 그런대로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또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어느 해 그 지방에 전염병이 돌아 문 씨가 병에 걸려서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딸 하나를 정성을 다해 키우리라 결심했습니다. 굳세게 살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문 씨가 죽은 지 일 년 남짓하여 까닭 없이 어머니의 눈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더니 기어코 아주 멀고 말았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어머니도 울고, 그 딸 정화도 울고, 스님도 울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사또 이하 모든 사람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장님이었던 스님이 눈을 떴고, 역시 장님이었던 어머니가 눈을 떴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이 스님의 어머니라는 말을 듣고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법화경〉을 독송하고 관세음보살을 염한 공덕이 이렇게도 클 수 있느냐고 모두들 놀랐습니다. 혜안 스님은 어머니와 누이를 데리고 보문암으로 돌아왔습니다. 수백 명의 환자가 스님이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기에 눈 코 뜰 사이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삭발하고 출가하였고, 감격하여 따라온 군노는 전혀 딴사람이 되어 절의 온갖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전각이 잇달아 세워지고 신도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세상 사람은 혜안 스님을 혜감 대사라 불렀습니다.

천병산 골짜기에서 〈법화경〉을 독송하는 소리가 멀리 멀리 퍼져 나갔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영기가 멀리 멀리 퍼져 나갔습니다. 그 소리와 영기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나갔습니다.

우봉규/작가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