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승려가 출입허가 얻어내
조선 승려 개종 위한 목적
종교의 자유 돌이켜봐야

지난 봄 숭례문 복원 준공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지금은 야경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장관을 이루고 있다. 국보 1호답게 장엄하다. 그런데 지금도 남대문이냐 숭례문이냐를 두고 사람들이 논란을 벌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남대문은 일본인들이 숭례문을 깎아 내리려고 지어 부른 이름이라고 우긴다. 과연 그럴까?

서울시는 몇 년 전에 동대문과 남대문의 안내 도로 표지판을 흥인지문(興仁之門 또는 숭례문(崇禮門)으로 고쳐 놓았다. 기록을 한 번 돌아보자. 태조 이성계는 도성의 남문이 완성된 것을 돌아보았는데 당시에 숭례문은 속칭 남대문, 흥인문(당시는 흥인지문이 아님)은 속칭 동대문이라 부른다고 했다.(태조실록 7년 2월조) 또 태종은 남대문을 돌아보고서 “태조가 도읍을 세우고 내가 행랑을 지어서 서울의 체모가 대강 완성되었지만 다만 남대문 안의 행랑을 세우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긴다”(태종실록 14년 2월조)고 했다. 당시에도 남대문이라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어려운 유교 용어로 부르지 않고 알아듣기 쉽게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이라 불렀던 것이다(북대문은 없다). 그런데 승려들은 숭례문이라 부르지 않고 여느 사람들처럼 남대문이라 곧잘 불렀다. 유교의 기본 이념인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따라 붙인 이름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승려들은 이 문을 출입할 수 없었다.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지한 조치때문이었다.

태종은 불교를 철저하게 이단으로 몰았다. 세종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시켰다. 따라서 임금의 특명이 없이는 승려들은 도성을 드나들 수 없었다. 문정왕후가 섭정을 한 시기인 16세기 끝 무렵에 출입금지가 잠시 풀렸으나, 1623년 다시 집권세력인 서인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승려만이 아니라 무당들도 도성에서 쫓겨났다.

승려들은 경복궁을 지을 적에 늘 그랬던 것처럼 역사에 징발되어 노동판에서 일을 했다. 이걸 도성출입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개화정권 시기, 김홍집 내각은 신부와 선교사들이 도성 안인 명동과 정동 등지에 똬리를 틀고 선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마당에, 불승들도 도성 출입을 허용해야 한다고 표방하면서 내각 안건에 올렸다. 하지만 번번이 흥선대원군이 무슨 심청인지 방해를 놓았다.

이럴 때 일본 승려들이 청일전쟁 시기, 종군승으로 들어와서 조선 승려들이 도성을 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조정에 다리를 놓으려 했다. 일련종의 승려인 사노는 1895년 조선 승려를 개종시키려는 목적에서 이를 추진해 고종의 허가를 받아냈다.

마침내 도성출입이 금지된 지 270여 년 만에 공식적으로 해제되었다. 그런데 일본 승려들은 자기네들 공로라고 곧잘 과장스레 자랑을 한다.

승려들과 신도들은 단오절을 맞이해 서울 도성 안에 수 천 명이 모여 무차대회를 벌이고 범패를 울리며 잿밥을 올렸다. 절 출입이 막혔던 양반의 부녀자들도 춤을 췄다. 그리해 불교도 신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유교 선비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시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숭례문 복원 준공을 보면서 필자는 이런 감상을 떠올렸던 것이다. 오늘날 남쪽의 송광사나 해인사의 스님들이 남대문 언저리로 들어오면서 예전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를 떠올리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남대문을 바라보면서 새삼 종교의 자유와 상호 이해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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