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고통 감싸지 못해
도발ㆍ대응 관계 벗어나
잘못 스스로 돌이켜봐야

필자에게 불교의 가장 큰 매력 중의 하나는, 세상의 만물이 다 서로 얽히고 설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그 뛰어난 ‘상호관계성’의 논리와 어떤 경우에도 인욕(忍辱), 하심(下心), 참회(懺悔)를 권하는 그 실천 윤리다. 불자 여러분들께서 이와 같은 진리를 개인적 삶에서 십분 체득하셨을 터인데, 과연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인간집단 사이의 관계, 예컨대 국가 사이의 관계에서도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해보는 것이 어떨까?

최근 20년 동안의 남북 관계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통상 ‘북한의 도발, 우리의 대응’이라는 틀로 남북관계를 인식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데, 입장을 바꾸어서 한 번 사고해보자. 혹시 우리도 겸허하게 참회할 부분이 있지 않을까? 예컨대 1994년에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과연 우리의 태도는 어땠는가?

김일성의 역사적인 공과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게 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 그는 우리로서는 일단 협상 파트너였다. 거래처와 그 사장에 대한 악감정이 있어도 ‘관계’가 있는 이상 반대쪽이 상을 당하면 애도를 표하는 것은 일상에서도 관례가 아닌가? 헌데 김영삼 대통령은 이에 비공식적으로 항의를 했으며, 조문 대신에 대대적인 ‘친북 분자’ 사냥을 벌여 120여 명의 국가보안법 구속자를 생산했다. 김일성이 죽기만 하면 북한이 곧 자멸될 터이니 더 이상 외교가 필요 없다는, 오만의 극치를 달리는 인식이었다.

김일성 사망 이후에 이미 소련과의 무역 붕괴로 인해 휘청거렸던 북한 경제는 1995년의 홍수, 흉작 등으로 사실상 준(準)몰락 상태에 이르렀다. 1995년 이후로 북한은 공식적으로 해외로부터 인도적 지원을 요청해왔다. 우리의 식량 지원 규모는 1996년에 세계 각국 및 유엔의 전체 지원의 약 0.6% (약 3천 톤)이었으며, 1997년에는 약 17% (약 6만 톤)이었다.  1999년에는 1%에 불과했다. 동족이든 아니든 간에 이웃이 아사할 위기에 빠지면 구휼해주는 것은 도리인데, 우리는 그 도리를 저버리고도 저버렸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햇볕 정책이 남북관계의 기조를 일시적으로나마 긍정적으로 전환시켰지만, 아주 기본적인 차원에서는 우리에게 여전히 북한은 적대적 타자였다. 2002년 1월 29일, 미국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은 미국의 대북 대결 태세 강화, 그리고 잠재적 침략의 가능성을 의미했다. 미국과 군사력 차원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북한으로서는 최악의 공갈, 협박으로 들렸을 터인데, 대한민국 정부가 햇볕정책 차원에서 부드럽게라도 이런 자극적 발언을 비판해주어야 한다는 의식은 우리에게 거의 없었다.

2008년에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햇볕정책이 포기됐지만,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다시 한번 이와 같은 방식의 대북 접근을 해야 할 것이다. 적대적 대결은 그 누구에게도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지향적인 대북 접근이 성공하자면 일단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부터 먼저 전제돼야 되지 않을까? 불자에게 자명한 진리겠지만, 참회 없는 이에게 이고득락, 요익중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