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에 양심ㆍ진실ㆍ전통 심는 딱재이

키가 작은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누나는 일찍 결혼했다. 찢어지는 가난 때문에 한명이라도 ‘버려야’ 했다. 아이의 나이 아홉 살 때였다. 하루는 누나 집에 놀러갔는데 잿물내가 났다. 닥나무를 삶을 때 나는 냄새였다. 열 살 때부터 아이는 겨울철만 되면 잿물내를 맡았다. 겨울철에 해야만 재료가 부패하지 않는 전통한지 속성 때문에, 누나 집에서 ‘디모도’를 하고 밥을 얻어먹었다. 여름철에는 품팔이를 하는 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밥을 얻어먹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니도 돈을 한번 벌어봐라”고 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당부했다. “논을 매던 밭을 매던 무조건 내 옆에 와서 해라. 주인 모르게 내가 니 골에 풀도 매주고 할 테니까.” 다른 사람과 품값을 같이 받기 위한 어머니의 고육지책이었다.

▲ 김삼식 한지장. 열 살 때부터 시작해 62년간 잿물에 손 담궈가며 전통한지를 만들고 있다.

 

“해봉께 안돼요.”

어린 시절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던 김삼식(71) 문경한지장이 갑자기 울음을 삼켰다. 60여 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아픔이 여전히 그의 기억 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나 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열 살 먹은 기 어무이가 암만 옆에서 도와줘도 따라가지 몬해요. 그래서 주인한테 들켰어요. ‘쪼그만한 기 밭을 매고 모를 숨굴라고 하나. 너 집에 가라.’ 그래서 집에 왔죠. 어무이도 아무 말 못하고. 집에 오면 할 일 없잖아요. 산에 가서 나무밖에 하는 기 밖에.”

아침과 점심은 제대로 못 먹고, 어머니가 일하고 바가지에 얻어온 밥을 나눠먹으며, 아이는 ‘나도 일을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래서 모 심기부터 배웠다. 다른 사람이 심고 남은 모를 가지고 와서 혼자 연습을 했다. 열두 살 되던 무렵, 아이는 최고 기술자가 됐다. 하지만 다른 동네에서는 작은 키를 보고 대뜸 손사래부터 쳤다. 그래서 동네 어른에게 부탁했다.

“다른 동네로 모를 숨구러 갈 때 저를 딜고 가줘봐요. 가셔가지고 ‘야는 나보다 더 잘 숨군다’고 얘기해서 모를 숨도록 해주세요.”

어렵사리 얻은 기회를 아이는 놓치지 않았다. ‘미싱 대가리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모를 심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루 평균 100평 정도 심을 때 아이는 300평을 심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아이는 ‘무엇이든 깊이 파고 들어가고, 이를 악물고 열심히 하면 안되는 게 없구나’라고 용기를 가졌다. 자형의 형인 故 유영운씨에게 전통한지 만드는 법을 배운 아이는 열일곱 살 때 ‘이제부터 혼자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집에 4평 정도의 작업장을 만들고 시작한 게 오늘의 딱재이(닥장이의 경상도 사투리로 닥나무 채취부터 한지 제조 전 과정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장인)에 이르렀다. 열 살 때부터 시작했으니 올해로 62년째인 셈이다.
 

▲ 잠자리 날개 같이 얇은 선익지. 하루종일 일해도 25장밖에 못 만든다.

“닥나무는 토질과 관계 있어”

김삼식 한지장이 있는 문경전통한지작업장은 종이를 만드는 삼식지소, 전통한지의 재료인 닥나무를 찌고 껍질을 벗기는 작업장, 닥나무를 재배하는 밭 등으로 이뤄져 있다. 2000여 평의 밭에서 1만 포기의 닥나무를 재배하고 있는데, 올해부터는 1000여 평을 더 늘릴 생각이다. 문경이 전통한지 만드는 데 좋은 점으로 속리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과 햇볕 등을 든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다. 김삼식 한지장이 ‘이 얘기는 처음’이라며 들려준 것이다.

“옛날부터 닥나무가 태양을 많이 보는 게 좋다고 전해져 내려오는데, 전라남북도에서 자란 닥나무는 (전통한지 만드는 데)쓰질 못해. (이유는)저도 모릅니다. 희한해요. 조우(종이)가 안돼요. 오십년 전에 제가 닥나무를 사가지고 트럭에 싣고 전라도로 팔아먹으로 댕겼어요. 워낙 생산량이 많기 때문에. 그때도 몰랐는데 요거 안지가 삼년 정도 됐습니다. 거기 닥이 나한테 오게 됐는데 안돼요. ‘아하 닥나무는 토질 관계구나. 태양을 많이 본다고 해서 되는 건 아이다’라고 알게 된 거지요.”

한지(韓紙)의 원료는 닥나무다. 11월에서 2월 사이에 1년생 햇닥을 채취해서 쓴다. 섬유가 여리고 부드러워 양질의 한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닥나무 중 참닥(조선닥)이 가장 좋다. 채취한 닥나무는 솥에 120~150단 정도 넣고 비닐을 여러 겹 덮는다. 증기가 빠져나가지 않게 밀폐한 뒤 불의 세기를 조절해가며 8시간 정도 찐다. 1시간 정도 뜸을 들인 뒤 비닐을 벗기고 꺼낸다. 찐 닥나무를 하나씩 잡고 밑에서부터 껍질을 벗긴다. 닥껍질을 피닥이라고 하는데,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말린 다음 한 묶음씩 묶어서 그늘에 보관한다. 피닥을 물에 불려 껍질을 칼로 긁어내면 청태가 나온다. 청태까지 완전히 긁어내야 백피(백닥)가 된다. 한 명이 하루 12시간 작업해도 6kg 남짓 나온다. 백닥을 하루 정도 맑은 물에 담근 뒤 잿물에 넣고 4~5시간 삶는다. 메밀대, 콩대, 목화대 등을 태운 재가 들어간 물은 누런색인데, 전통한지가 누런색을 띠는 이유다. 종이를 하얗게 하고 당분이나 기름 등을 없애기 위해 흐르는 물에 담구면서 일광표백을 한다. 맑은 날에는 4일 정도, 흐린 날에는 일주일 정도 한다. 일광표백이 끝난 백닥을 닥돌 위에 올려놓고 닥방망이로 60~70분 정도 두들기면 닥섬유가 된다. 이것을 물에 넣고 막대기로 저어주면 솜처럼 풀리는데, 여러 번 깨끗이 씻으면서 티(이물질) 고르기를 한다. 종이를 뜨기 위해선 닥풀이 필요하다. 황촉규라는 식물의 뿌리를 물에 넣고 으깨면 점액이 나온다. 이것을 닥섬유와 일정한 비율로 넣고 막대기로 잘 섞어준다. 대나무로 만든 발로 우물 정(井) 형태로 물질을 한다. 한지의 두께는 물질의 횟수에 따라 결정된다. 이때 만들어진 한지는 습지상태다. 한 장씩 포갤 때 긴 실로된 베개를 끼워 나중에 떼기 쉽게 한다. 한지의 질을 높이기 위해 굴렁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굴리면서 눌러서 물을 뺀다. 물이 빠진 습지를 한 장씩 떼어낸 뒤 갈대로 만든 빗자루로 주름이 생기지 않게 건조대에 붙인다. 건조한 한지는 100장 단위로 포개어 보관한다.

▲ 초조대장경 복원에 사용된 한지.

 

“잿물 만들기 가장 어려워”

닥나무 채취→닥나무 찌기(닥무지)→닥나무껍질 벗기기→백닥 만들기→잿물에 백닥 삶기→일광표백→닥섬유 만들기(두드리기)→종이뜨기(물질하기)→탈수하기(물짜기)→건조작업→한지 완성 등으로 된 전통한지 제작과정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일까?

“잿물을 만드는 기 제일 어려버요. 양잿물을 넣으면 삭아서 수명이 짧아요. 천년이 아이라 단 및 백 년도 못가요. (다른 데서는 잿물 만드는 것을)안하고 있는 기 아이라 못하고 있는 겁니다. 바람이 불면 재가 다 날라가 버리고 하나도 없어요. 또 및차를 쳐때도 재가 얼마 안 나와요. (다른 사람들이)종이 뜨는 걸 테레비에서 수십 번 봤는데 그거 전부 눈으로 보키(보여)주는 겁니다. 한지 만들 때 잿물로 하는 기 좋다는 거 세계가 다 알아요. 하지만 못해요. 방법을 몰라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감이나 자부심의 다른 표현이다. 초조대장경이나 조선왕조실록 복원에 그가 만든 종이가 들어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우리나라 전통한지의 우수성에 감탄한 프랑스 루브르박물관도 그의 작업장을 찾을 정도다. 하지만 뛰어난 품질에 비해 생산되는 양은 많지 않다. 하루에 25장에서 300장 정도. 그것도 11월 중순에서 3월까지만 만들 수 있다. 참꽃이 필 무렵부터는 재료가 쉽게 부패하기 때문에 일을 접어야 한다. 종이를 만들지 않을 때도 할 일은 많다. 닥나무 껍질을 벗기고 잿물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작업을 김삼식 한지장과 부인, 딸과 막내아들이 하고 있다.

“잿물을 안 만들고 화공약품을 사면 얼마나 드느냐. 2만5000원이면 됩니다. 잿물 만드는 데 우리 네 식구가 꼬박 한 달을 매달려야 돼요. 닥 껍디기를 빗기는데 또 긁어야 돼요. 조우를 하얗게 만들기 위해서 표백제를 쓰면 17만원 미만 듭니다. 칼로 빗기지 말고 약품을 쓰면 싸고 편하지요.”

하지만 그는 쉽고 편한 길을 가지 않았다. 45년 전 전국에 전통한지를 만드는 곳이 700개가 넘었다. 문경시에만 28개, 삼식지소가 있는 농암에도 5개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신식으로 한지 만드는 법을 배웠고, 대량생산하는 법을 도입했지만, 그는 전통을 고수했다.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몸뚱이 하나만으로 종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욕심을 버렸고 욕심을 부렸다.

“욕심만 안내면 됩니다. 뭔 욕심. 돈 빨리 버는 욕심. 그런데 일을 마이 하는 욕심은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남들은 ‘일은 씨기 안하고 돈은 빨리 벌어야 되겠다’고 했지만 나는 완전히 바까 했어요.”
 

▲ 김삼식 한지장의 아들인 춘호 씨가 물질을 하고 있다.

 

‘동학’, 전통한지 지켜온 힘

그의 뒤는 막내아들인 김춘호씨가 잇고 있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아들이 ‘한지를 해야겠다’고 말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마저 올해 그만두느냐 내년에 그만두느냐 고민할 때였다.

“너는 배았으니까 하지 마라.”

어머니와의 기억을 떠올렸을 때처럼 그는 이번에도 울음을 삼켰다. 부인이 17년간 아파 네 살 때부터 심부름을 하던 아이였다.

“내가 핑생을 고생했는데 너까지 고생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단칼에 베었다. 하지만 아들은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이유를 물었다.

“제가 아부지한테 말은 안 하고 전국을 돌아다녀봤는데 전통한지 하는 사람은 아부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할랍니다.”

“그러면 니는 니 애비 덕택에 돈 벌어 먹을라고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건을 걸었다. 3년 동안 인생 공부를 하고 돌아오면 받아주겠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그길로 집을 떠났다. 2년 넘게 자동차 영업사원을 하며 돈 버는 재미를 붙였다. 그런 아들에게 그는 100원짜리 1000원짜리 장사하는 곳으로 가라고 했다. 작은 돈도 아까워하고 큰 돈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년 반 동안 주유소에서 세차 등을 하며 푼돈을 모으던 아들이 ‘이제 집에 가야겠다’고 말했다. 금쪽같은 내 새끼만큼은 잿물에 손 안 담그기를 바랐지만 그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귀향한 아들은 충북대 전통한지연구실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전통한지의 이론적인 뒷받침을 했다.

김삼식 한지장에게 종교가 있냐고 슬쩍 물었다.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있습니다. 부모님 때부터 동학을 믿는 게 아니라 닦고 있습니다. 아들도 닦고 있고.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찬물을 떠놓고 하느님한테 빕니다. 생일이나 초하루, 보름 때는 제사를 지냅니다. (다른 사람들은)힘들어서 몬해요. 제가 동학을 안 닦았다면 (인생)방향이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겉으로는 도(道)를 하면서 도둑놈 심보로 장사하면 안 되잖습니까?”

김삼식 한지장은 삼식지소(三植紙所)에서 종이를 만든다. 잘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양심’을 심고 ‘진실’을 심고 ‘전통’을 심어야만 전통한지를 만들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이 담겨있다.

▲ 티(이물질) 고르기.
▲ 물질하기 전 닥섬유.
▲ 탈수하기.
▲ 습지상태의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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