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 총무원장 정산 스님

10년 전 한국 사회는 절박한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외환 위기로 인해 국가 부도라는 벼랑 끝에 섰던 것입니다. 그 고비를 넘기기 위해 한국 사회는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변신을 요구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국제적 기준에 맞추어 재편성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가혹한 구조 조정을 통해 효율성을 높여야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야 했습니다.

비록 외환 위기를 신속하게 극복하고 다시금 세계적 경제 활동을 펼치는 한국의 저력을 과시하기는 하였지만, 외환 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만성적 고용 불안과 심화된 빈부 격차가 뿌리내렸습니다.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그저 논다는 젊은이들만 해도 무려 100만 명을 넘는다는 고실업의 수렁에 깊이 빠져 버렸습니다.

한국 사회는 외환 위기 이후 전반적으로 그 특유의 경제 활력이 퇴색되었습니다. 넘치는 자신감으로 고성장 가도를 달리던 옛 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국 경제의 수준이 후진국형 양적 발전 단계를 벗어나 선진국형 질적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분석을 감안한다면, 과거와 같은 고도 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습니다. 한국 경제는 선진국형 저성장 고실업 패턴에 빠져든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점을 감안한다 할지라도, 현재의 한국 사회는 그 특유의 자신감과 활력을 많이 상실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심화되는 빈부 격차나 정치 갈등은 한국 사회의 침체된 분위기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저성장, 고실업, 빈부 격차, 정치 갈등 등이 한데 겹쳐 한국인들의 자신감과 활력을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활력 감퇴의 요인들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사회 분열입니다. 현재 우리가 자랑하는 세계적 경제 규모는 사실상 극도의 빈곤에서 일구어낸 것입니다. 자원도 없고 산업 시설도 없으며 자금도 없는 경제 황무지에서 일구어낸 것이 한국 경제입니다. 한국인들은 그 경제 황무지를 오직 자신감과 활력으로 개척해 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능력의 주인들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저성장이라든가 고실업, 열악한 무역 환경 등이 자신감과 활력 감퇴의 원인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정도의 환경에 주눅들 정도였다면 한국 경제의 신화는 애초에 불가능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난관도 헤쳐나가는 오기와 자신감은 한국인의 체질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사회가 그 특유의 활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환경보다는 심리적 문제로 보입니다. 한국인들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강한 응집력으로 뭉쳤습니다. 10년 전 외환 위기 때 금반지 들고 나와 줄서던 모습은 그 응집력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응집력이 예전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응집력을 훼손하는 심리적 분열 때문으로 보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사회는 실로 배타적인 정치 분열과 노사 분열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보수와 혁신을 명분으로 내건 정치 분열은 국가 운영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일지라도 정파가 다르면 무조건 반대하고 비난합니다. 국가 운영을 대리하겠다는 사람들이 수준 이하의 배타적 정쟁을 일삼다보니, 사회 전체가 배타와 불신의 공기로 오염되고 있습니다.
노사 대립과 갈등은 여전히 경제 발전의 핵심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공생을 위한 상식과 원칙은 집단 이기심에 의해 너무도 쉽게 외면 받습니다. 최근 한 자동차회사의 파업을 보면서 사회 전체가 그 회사에 실망과 분노를 드러내었습니다. 심지어 그 회사 차량의 불매 운동까지 전개될 정도로 한국 사회는 상호 파멸적 노사 관계에 지쳐 있습니다.

지금까지 숱한 난관을 헤쳐온 한국인의 강한 응집력은 강한 통합 의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강한 민족 의식, 민족 문화와 역사에 대한 높은 자긍심은 한민족을 통합시켜 강력한 응집력을 발휘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극심한 정치 분열과 계층 분열 등이 한민족의 민족애와 통합력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정도에 이르고 있지는 않은가 우려됩니다.

올 한 해는 좋건 싫건 간에 온 국민이 차기 대통령 선출 문제로 갑론을박할 것입니다. 최근까지의 여론 조사로는 차기 대권 주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으로 국가 경제를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으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경제 부활의 관건은 경제 정책 여하에 있다기보다는 국가 통합력에 있습니다. 소모적 정치 분열과 계층 분열을 화합 국면으로 돌릴 수 있는 통합 능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 고질화되고 있는 분열 의식을 봉합시킬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한국 사회 지도자의 요건일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전통에서는 언제나 분열보다는 화합, 배타와 증오보다는 관용, 독선보다는 이해가 주류를 이루어 왔습니다. 차기 지도자는 이 불교의 지혜와 자비 전통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인물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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