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울산대 교수

양자거(陽子居)가 노자를 만나려고 남쪽 패(沛) 지방에 갔는데, 그때 노자는 서쪽 진나라로 갔다. 그래서 양자거는 교외로 나가 양(梁)에서 노자를 만났다. 노자는 그와 함께 길을 가다가 하늘을 쳐다보면서 탄식했다. “처음에는 널 가르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구나!” 양자거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윽고 여관에 이르자 그는 세숫대야, 양칫물, 수건, 빗을 노자에게 바치고 문밖에서 신을 벗고는 무릎걸음으로 노자 앞으로 가서 말했다. “아까 선생님께 여쭙고 싶었지만 선생님께서 길을 가는 도중이라서 감히 여쭙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한가하신 듯하니,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을 묻고 싶습니다.”

“그대는 눈을 치켜 뜨고 있는 것이 거만해 보인다. 그러니 누가 감히 그대와 함께 하려고 하겠는가? 최상의 청렴함은 오히려 더러운 듯하고, 성대한 덕은 오히려 부족한 듯하다.” 깜짝 놀란 양자거는 낯빛을 고치면서 말했다. “공경히 그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처음 양자거가 여관에 갔을 때는 함께 묵는 손님들도 그를 맞이했고, 여관집 주인은 자리를 깔아줬다. 그의 아내는 수건과 빗을 바치고, 같이 묵는 사람들은 동석하길 피하며 불을 쬐던 사람도 부엌에서 달아났다. 그러나 노자의 가르침을 듣고 돌아온 이후로는 여관에 묵는 사람들이 서로 그와 함께 하려고 앉는 자리를 다툴 정도였다.     
- ≪장자≫잡편 <우언(寓言)> -

그릇의 능력은 비어있는 공간에서 비롯된다. 비어있는 만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이 차 있는 그릇은 나머지 반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완전히 비어 있는 그릇은 그 두 배를 더 담을 수 있으며, 가득 차 있는 그릇은 더 이상 담을 능력이 없다. 그런데 세간의 상식은 얼마나 차 있는가를 중시하지 얼마나 비어있는가를 주목하지 않는다. 반면 노자나 장자는 오히려 비어있는 공간을 주목한다.

그릇이 마음이라면, 꽉 차 있는 마음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담아내지 못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완벽한 것이라 생각하여 더 이상 다른 지식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마음은 가득 차 있는 그릇과 같다. 가득 차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담아내지 못하는 마음은 닫힌 마음이고 죽은 마음이다. 그런 마음에 담긴 지식은 진리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선과 교만의 뿌리가 되고 만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 믿고 있는 신념, 추종하는 이념에 갇혀 더 이상 새로운 통찰들을 거부하는 폐쇄적 마음을 사람들은 불편하게 여긴다. 자기만 옳다고 우기는 무지와 독선, 남이 못 가진 지식을 가져 남보다 낫다고 우쭐대는 교만과 거만은 타인을 불편하게 만든다. 생명의 본능은 그런 닫힌 마음들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 그리하여 닫히고 막히고 굳어버린 마음은, 스스로 잘났다고 거들먹거리지만, 진리의 빛은 그를 떠난다. 진리의 빛이 가려질 뿐 아니라 세상이 그를 기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엇이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를 인지조차 못한다. 그는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것과 같다. 진리는 열려 있는 마음, 비어있는 마음에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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