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완연한 봄기운이 포근한 하루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일상사가 따스한 봄의 온기처럼 상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만나 기분을 망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이 말입니다.

최근 회자되고 있는 ‘막말남’ ‘막말녀’는 사실 상대의 존재를 배려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인간관계의 슬픈 자화상을 보여주는 예에 해당합니다.

말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예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팔정도를 통해 항상 바른 말[正語]을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바른 말’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를 경계하는 데에서 지켜질 수 있습니다. 네 가지란 첫째가 거짓말이요, 둘째가 이간질이며, 셋째가 거친 말이고, 넷째가 쓸데없는 말입니다. 이 중 거친 말로서 상대를 대하면서 싸움이 일어나고 ‘막말남’ ‘막말녀’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말은 또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좋은 생각에서 좋은 말이 나온다’는 말처럼 생각을 다듬어 신중하게 구사할 때 인품과 사람의 향기를 전할 수 있는 법입니다.

과거 선사들은 입을 여는 것이 혀에 있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혀는 ‘맛’과 ‘말’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땐 맛을 느끼게 하고 의사를 소통할 땐 말의 기능을 맡습니다. 따라서 짜고 맵고 뜨거운 것에 대한 호불호를 혀가 대신하여 가려줍니다.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려한 수식어로 능변을 자랑하는 혀가 있는가 하면 거친 말과 욕설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혀도 있습니다. 아첨에 뛰어난 특기를 가진 혀가 있는가 하면 이간질에 능하고 두말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혀가 있습니다. 반대로 사실이 아니면 절대로 말하지 않고 설령 상대방이 상처를 입는다 해도 쓴 충고를 마다 않는 혀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어떤 말이든 한 번 입 밖에 나오면 다시 주워 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성인일수록 또는 사회의 지도층일수록 그래서 말에 대한 책임감이 강조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혀에 ‘도끼’를 품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혀 속엔 살상의 무기가 들어 있습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한 마디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것이 혀가 지닌 다중성입니다.

단순히 혀로 내뱉는 것은 진정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보의 교류와 소통이라는 의사구조를 갖는 게 아닌 배설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말은 무형(無形)의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루기가 까다롭습니다.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화와 불화가 생기고 행과 불행으로 나뉘게 됩니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8년간의 사상적 논쟁을 벌였던 고봉 기대승(1527~1572)은 명종 앞에서 그의 제왕학(帝王學)을 펼쳐 보였는데 그 내용 가운데 언로(言路)를 뚫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언로는 사람의 혈관과 같아 막히면 죽는다는 게 고봉의 지론이었습니다. 그는 “제왕의 눈과 귀는 그 언로를 향해 항상 맑게 열려 있어야 하고, 감지되는 바가 있으면 언제나 신속하게 반응해야 한다. 제왕의 눈과 귀가 막혔을 때는 사대부들이 목숨 걸고 그것을 뚫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봉은 사람의 혈관에 비유하여 말의 길[言路]이 막히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런데 언로란 혀로써 개통되는 것이 아니라 뜻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뜻이 있을 때 길이 있듯이 뜻으로 언로가 형성될 때 우리 사회는 그만큼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말은 사람 사이의 혈관 기능을 담당합니다. 이러한 중요한 기능을 알지 못한 채 거친 말과 욕설로 사람을 대한다면 그 스스로 자멸과 훼손의 길을 걷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과거 민족혼을 불살랐던 국어학자 정인보 선생도 “말은 마음의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말에도 순결성이 있고 규범성이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은 언어의 경제성과 직결됩니다. 남들이 귀담아 듣지도 않을 말을 남발하는 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구경〉 ‘도장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듣기 좋은 착한 말을 하라/마치 종소리가 울려 퍼지듯/
그는 모든 시비의 논의를 없애고/속세에서 벗어나 편안해 지리라.”
(出言以善 如叩鐘磬 身無論議 度世則易)

‘듣기 좋은 착한 말을 하라’는 것은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종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싱그럽게 혹은 상쾌하게 만들어 주듯이 유익한 말을 가려서 하라는 뜻입니다. 누구에게나 이익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시비를 논하거나 갈등을 불러 마음 고생을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편안합니다. 부처님은 사람과의 언어 소통에 있어서 이 경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이의 마음을 여는 아름다운 말로 하루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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