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불사에 열중, 남은 생 수행 매진”

“40여 년을 사찰 불사에 매진했는데,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조금 아쉽습니다. 남은 생은 나를 닦는데 매진할 생각입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수행에 대한 열망을 늘 마음 속에 품고 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 또한 수행이다. 지난 1일 만난 경남 거제 거광사 채용호 고문(73)도 늘 수행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지만, 그리 쉽지 않단다.

채 고문은 거광사 불사를 일군 장본인이다. 1974년 구인사 참배 후 독실한 불자가 됐다. 당시 하던 일이 큰 손해를 입어 모든 재산이 한순간에 없어졌고, 건강 또한 좋지 않았었다. 그러다 구인사를 알게 됐고, 아픈 몸을 이끌고 구인사를 찾았다. 2대 종정 대충대종사를 친견한 후 가르침을 받은 그는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생계에 매달렸다. 그 덕분인지 살림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고, 이를 부처님의 가피로 받아들였다.

채용호 고문은 “대충대종사님의 가르침에 따라 부처님 법을 믿고 열심히 일했더니 아픈 몸도 나았다”면서 “이때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남들에게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불사를 시작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대충대종사 친견 아픈 몸 나아
15년간 신도회장 맡아 불사 추진


그는 1978년부터 모임을 만들어 법회를 시작했다. 법회를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잘 몰랐던 터라 스님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첫 모임 때 20여명이 모였다. 조금씩 인원이 늘었지만 문제는 공간이었다. 장소를 물색하다가 친척 소유의 공터에 자리를 잡고 천막을 치고 법회를 열었다. 그러다 인근 산에서 황토를 구해 동생과 함께 직접 집을 지었다. 이때부터 스님을 법사로 초청해 법문을 들었다. 첫 법회 때 100여 명이 모여들자 신심이 절로 일었단다.

채 고문은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운덕 스님에게 법당 건립을 요청했더니, 법당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하셨다면서 “대충대종사님과 도용 종정예하, 운덕 대종사님의 지원으로 오늘의 거광사가 존재하기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낮에 생계에 매달리던 그는 저녁에는 가건물이었지만 바람은 막을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수행에 매진했다. 그러던 중 꿈에 상월원각대조사가 나타나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더욱 열심히 포교하고 수행했다. 돈은 없었지만 매달 한 번은 구인사를 찾아 관음정진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채 고문은 “가건물에서 법회를 봤는데, 어느 날 천장에 달아놨던 연등에 불이 붙어 건물 내부가 모두 불타버려 절망감마저 들었다”면서 “대충대종사님께 이 일을 말씀드렸더니 ‘부자되겠네’라고 말씀하셔서 다시 힘을 얻어 사찰을 건립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해 지금의 자리에 법당을 건립했다”고 말했다.

▲ 채용호 고문이 관음보전 앞 계단을 쓸고 있다.

부지 매입 비용과 법당 건립 불사금은 총무원에서 지원을 받았다. 법당을 건립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개인이 절을 짓는다는 투서가 경찰서에 들어갔고, 조사를 받기도 했다. 심지어 검찰 조사까지 받았다. 채 고문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공심으로 불사를 진행했고, 부처님이 이를 보살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절을 지어 종단으로 명의를 이전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15년 간 신도회장을 맡아 사찰 불사와 포교에 매달렸던 그이지만, 아직 미련이 남는 게 있다. 바로 수행이다. 거광사 바로 옆에 살면서 매일 사찰에 들르지만, 수행의 벽은 높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30분이라도 법당에 앉아 기도를 한다.

그는 “37년간 불사와 포교에 매달렸지만, 나를 닦는 기도가 더 중요함을 새삼 느끼고 있다”면서 “불법에 귀의하면서 부처님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남은 생은 마음을 잘 닦아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