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화된 차별과 이를
강화하는 사회에 말못하고
행동하지 않는 불교는 ‘무능’

과거에 비해 우리사회는 참 살기 좋아졌다. 거리도 깨끗해지고 물질적 풍요 역시 국제적으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과도한 사교육과 높은 대학 등록금으로 부모는 허리가 휘고, 학생 자신들도 여러 교육장소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가축과 같은 모습으로 되어 가고 있다.

현 정권 들어서서 추구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가치 속에 무한 경쟁은 당연한 것으로 되어 기업만이 아니라 대학마저 이웃에 대한 배려는커녕 싸워 이기는 것만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풍토 속에 근로자의 최저임금 논의가 몇 십 원 단위로 결렬되고 수많은 이들이 비정규직에 내던져져도 우리사회의 기득층은 그저 타인의 일로만 바라본다. 이제 가난한 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빈곤을 벗어나기 어렵다.

모든 것은 세습된다.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인도의 카스트 제도의 출현이다. 자신의 신분 계층에서 무엇을 하건 정당하고, 가지지 못한 자는 태어나면서부터 허락되지 않는, 가져서는 안되는 것이 결정되어 진다. 그렇기에 한진중공업의 한 여성근로자가 높은 크레인에 올라 목숨을 걸고 외쳐도 단지 남의 일이다. 그런 것은 원래 없는 자가 늘 벌이는 상투적인 행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2500년 전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면서 사람의 존귀는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위에 따라 정해진다고 했다. 한진중공업 사태에 동참하고 지지하는 이들이 모여 평화로운 행진을 하고자 했건만 이를 막기 위해 전국 수십 대 기동대 버스가 한 곳에 집결했고, 결국 폭력 진압이 등장하였다. 전국 기동대가 집결해 벌인 상황을 주요 언론 매체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렇게 가진 자가 못가진 자를 강탈하는 사회구조는 더욱 강화되고 이를 위해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그리고 언론권력의 야합은 노골적으로 눈에 드러난다. 그런데 한진중공업 현장에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며 자타불이와 동체대비를 말하는 불교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중생이 아프기에 스스로가 아파야 했던 유마는 어디에 가 있는가.

여러 신부님과 목사님들의 모습에 비하여 초라한 불교를 새삼 언급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재벌 기업과 결탁한 정치세력과 이를 강화하고 있는 언론권력에 결탁한 또 다른 종교권력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연기적 실상이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고 더불어 상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치열하게 온 몸으로 수행하는 것이 불교적 자세라면 진정한 수행이란 개인의 문제이자 동시에 사회적 문제이다. 이미 구조화된 차별과 이를 강화하고 있는 사회에 대하여 말 한마디 못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불교는 마약에 불과하다. 진정한 가르침은 중생의 병을 낫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병을 악화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국가경쟁력을 만드는 것이 재벌이라고 변명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러한 재벌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수많은 하청업체와 이에 속한 비정규직 근로자들이다. 부처님은 빈자의 등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고 소중하게 취급되는 사회를 위해 가르침을 펼쳤다.

지금 이 시대에 과연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부처님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는 무엇을 잊고 있으며, 무엇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 온 몸으로 절규하지 않는다면 한국불교의 희망은 없다. 깨어있는 자(覺者)가 된다는 것은 중생을 사랑하는 일이다.

우 희 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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