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외대사 주석하며 중창, 천태종풍 널리 펴

▲ 진주 용암사지 전경. 해주 정씨 문중의 사유지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수많은 전각과 스님들, 그리고 스님들의 끊이지 않는 염불소리와 수행으로 뜨거웠던 도량은 온데 간데 없고, 그들이 살았던 흔적만 남아 있는 곳, 폐사지. 초록이 우거지고 날짐승과 들짐승들이 휴식처로 삼을 땐 그나마 위안이 되지만, 그들의 발길마저 뚝 끊기면 스산하기 짝이 없다.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龍岩里)에 위치한 옛 천태도량 용암사도 그렇다. 용암리 뒷산은 영봉산(靈鳳山)이다. 용암사는 이 영봉산 자락에 터를 잡고 있다. 길 안내를 해주는 내비게이션도 용암사 터 부근에서 안내를 멈춘다. 안내표지판도 없어 동네 주민에게 길을 물어야 한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300여 미터 오르면 소 몇 마리가 고개를 내밀고 길손을 반긴다.

이곳은 해주 정씨 문중의 재실인 장덕재(章德齋)가 있는 곳으로, 정씨 집안의 사유지다. 어느 곳에도 용암사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재실의 정문인 비연문(斐然門)을 지나면 오른쪽 편에 어느 스님의 비를 떠받치고 있던 귀부와 비의 머리장식인 이수가 보인다. 귀부와 이수 뒤로 부도 한 기와 석등, 불상이 봉안된 자그마한 전각이 하나 서 있다.

용암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 박전지(朴全之)가 쓴 ‘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 고려학사 최자(崔滋 1186~1260)가 쓴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萬德山白連社圓妙國師碑)’ 등 일부 문헌에만 전해 당시의 사세나 주석했던 스님 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영봉산용암사중창기에는 ‘도선국사가 지리산 성모천왕으로 부터 세 개의 암사(巖寺)를 창립하면 삼한이 통일되어 전쟁은 저절로 그치게 된다는 은밀한 부촉을 받고 선암사(仙巖寺), 운암사(雲巖寺)와 함께 이절을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 보물 372호 용암사지 부도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萬德山白連社圓妙國師碑)’에는 천태종을 중흥시킨 원묘국사와 관련된 용암사 설화도 있다. 비문에 따르면, ‘대사는 여러번이나 지자(智者)대사를 꿈에서 보았고 대중에게 묘종(妙宗)을 강(講)하거나 혹은 화장암에서 안선(安禪)하되 부동하니 끝내는 마매(魔魅)를 항복받고, 혹은 산신이 절터를 가리켜 주고, 혹은 용암사의 도인인 희량(希亮)의 꿈에 금련좌에서 대사를 기다리는 등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해주 정씨의 사유지 일부로 전락
석불ㆍ부도ㆍ석등ㆍ석비 옛 자리 지켜

                              ▲ 경남도유형문화재 4호 석불좌상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3~1245) 스님은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개창한 천태종을 부흥시킨 천태종의 고승이다.

고려시대 천태종의 중요사찰 가운데 한곳이었던 용암사에 주석하며 사찰을 중창하고 천태일승묘법을 널리 편 이는 고려 충선왕대의 고승 무외국통(無畏國統) 정오(丁午)다. 무외국통은 1314년(고려 충숙왕 1) 용암사로 거처를 옮긴다. 1315년 충숙왕은 제찰사 한중희 등에게 전지를 내려 사찰을 경영하게 했고, 1316년 가을에는 제찰사 박효수에게 사찰을 중창하도록 명했다. 이 때 무외국통은 1318년 80여 칸을 새로 짓고 20여 칸을 중수했다. 당시 전각 안에는 닥나무 종이를 바르고 왕골을 깔았다고 하며, 금당에는 석가여래를 봉안했다고 한다.

또 정오 스님은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상을 개금했으며, 대장경도 봉안했다. 당시 염장별감 이백겸과 방우정은 왕명에 따라 설전지 3만여 장과 옻칠한 함 140여 개를 만들었다. 무외국통의 제자 승숙ㆍ일생 스님 등은 강화도 판당에 가서 부족한 장경을 찍어와 모두 600여 함을 만들어 비단으로 치장한 뒤 봉안했다. 같은 해 11월 18일 방우정이 다시 왕명을 받아 7일 동안 낙성법회를 성대하게 베풀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찰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임진왜란 이후 이 지역에 터를 잡은 공신 정문부(1565~1624) 후손들의 세거지(世居地)가 되면서부터 해주 정씨 문중의 사유지로 바뀌었고, 용암사는 더부살이 신세가 됐다.

현재 남아있는 문화재는 보물 372호 용암사지부도와 경상남도유형문화재 4호 석불좌상, 비지정문화재인 석등과 홍자국통비 귀부와 이수를 비롯해 해주 정씨 재실인 장덕재(章德齋. 1945년 이전 건축물)의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석탑 부재 등이 있다.

▲ 홍자국통비의 비신은 사라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았다.

석불좌상은 단칸의 전각에 봉안돼 있다. 조성경위는 알 수 없다. 이 석불좌상의 불두 부분은 지장보살의 모습을, 수인은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어깨까지 두건(頭巾)을 길게 내려 쓴 불상의 얼굴 오른쪽 뺨 부분은 훼손됐지만, 전체적인 얼굴 윤곽은 타원형으로,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온화하다. 사각형의 대좌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데, 일반적인 불상에 비해 무릎이 약간 넓고 높다.

착의는 통견으로 법의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가슴 앞부분을 넓게 파지 않는 인도식의 착의법을 따랐다. 옷 주름은 선으로 처리되어 몸매가 뚜렷이 드러나며, 목 부분의 옷깃은 두껍게 처리하였다. 하체는 무릎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마멸상태가 심한 편은 아니다.

보물 제372호로 지정돼 있는 진주 용암사지 승탑(晉州 龍巖寺址 僧塔)은 원래는 용암사 터의 서북쪽에 파손된 채로 있었는데, 1962년에 원래의 위치로 옮겨 복원했다. 기단은 아랫돌 각 면에 구름무늬를 깊게 새기고 그 안에 불법을 수호하는 천부상(天部像)을 양각했는데, 그 수법이 우수하다. 연꽃무늬를 새긴 기단의 끝부분을 지나 탑신의 지붕으로 올라가면 얇은 지붕돌 밑에 똑같은 테두리의 평평한 받침이 눈에 띈다. 지붕선의 끝에는 꽃장식이 있다. 경사면은 완만하고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얇은 띠로 둘러져 있다. 머리장식부분은 석탑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구조물들이 차례로 올려져 있다.

누구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적으로 비례가 잘 맞고 모든 부재가 8각으로 조성. 부도 주위에는 석등, 석탑의 부재가 함께 터를 지키고 있다.

세월의 무게에 짓눌리고, 불제자들의 무관심 때문에 점점 잊혀져 가는 용암사 옛 터. 사람들의 발길조차 거부하려 남의 집 안쪽에 숨어버린건 아닐까. 비록 다 스러졌지만, 그 흔적만이라도 온전히 간직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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