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제 교수, 퇴옹성철 100주년 탄신 포럼서
“비구측 국가권력 기대 종교 자율성 포기”


이승만 정권이 왜색 대처승을 척결하라는 선동적 구호를 담은 담화를 8차례나 발표한 것은, 반일감정을 이용해 친일파 정권의 성격을 희석시키고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또 당시 비구승 측이 정치적 상황이나 이승만의 프로파간다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국가권력에 기대 분규를 진행해 종교의 자율성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조명제 신라대 교수는 5월 26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한국 근대불교 100년과 퇴옹성철’ 포럼에서 해인총림의 설립과 운영을 위한 불교계의 노력이 왜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불교유시와 한국근대불교의 질곡을 접목해 날카롭게 비판했다. 〈사진〉

조 교수는 해인총림의 붕괴가 비구ㆍ대처 분쟁을 비롯한 당시 불교계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불교계는 오랜 봉건적 체질과 식민지 불교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채 사회적 격변을 맞았다. 근대적인 불교의 방향을 모색할 만한 주체가 형성되지 못했고,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경제적인 자산마저 치명상을 입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이승만 정권이 ‘왜색불교’인 대처승을 사찰에서 내보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1차 담화를 발표하면서 불교계는 비구ㆍ대처승 분쟁이라는 내부의 파국을 맞게 됐다.

8차례나 계속된 유시와 국가권력의 개입을 통해 이승만이 ‘불교정화’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고 조 교수는 설명했다. 1차 유시는 1954년 5월 21일, 제3대 민의원 총선거가 실시된 다음날이었다. 3대 총선에서 이승만은 정권의 무제한적 개입을 통해 이전까지 정국 운영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국회를 장악하고 1인 1당 독재 구축을 꾀했다. 2, 3차 담화는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안에 대한 찬반양론이 벌어지던 시기에 발표됐다. 4차 담화는 ‘사사오입 개헌’ 이후에 발표됐으며, 55년 단일 야당으로서 민주당이 출범할 즈음에 5차 담화가 발표됐다.

조 교수는 이승만이 불교 분규 담화 발표를 통해 국민들의 반일이데올로기를 선동하고 확산시켜 반이승만 세력을 배척하는 데 활용했다고 분석했다. 실제 1954년 5월의 3대 총선에서 자유당이 다수를 차지했는데, 자유당과 국회의 요직을 친일파가 장악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1954년 5월 13일 담화에서 “일제 강점기에 고등관을 지내고 일본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하였다고 하더라도 지금 와서 탕척 받을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은 애국자”라고 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친일파에 대한 면죄부를 줬다.

조명제 교수는 “구한말 이후 지속적으로 모색됐던 불교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이 와해되고, 지나치게 편협한 전통으로 회귀했다”며 “불교를 사회와 역사에서 분리시킨 것은 단순히 시대와 단절시킨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시민 사회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