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은 분별 떠난 ‘초연인격’ 통해 空과 幻을 극복

南 華 寺 남  화  사 - 소동파(蘇東坡)  -

云何見祖師(운하현조사) 어찌하여 조사를 알현하고자 하는가

要識本來面(요식본래면) 나의 본래면목을 알고자 함이네.

亭亭塔中人(정정탑중인) 원적하여 탑 중에 계신 조사께서는

問我何 目卯見(문아하묘견)나에게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 라고 묻는다.

可憐明上座(가련명상좌) 가련한 명상좌

萬法了一電(만법료일전) 만법을 한 순간에 전광석화로 요달한다.

飮水卽自知(음수기자지) 물을 마셔보고 스스로 차고 더움을 알듯이

指月無復眩(지월무부현) 다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보고 달이라 하는일 없네.

我本修乃人(아본수내인) 나는 본래 수행인이라서

三世積修煉(삼세적수련) 과거 · 현재 · 미래의 삼세식을 수행해 닦으려 했는데

中間日念失(중간일념실) 중간에 한 생각 잘못 일으켜

受此百年讉(수차백년유) 일생 동안 무수한 시달림과 고난을 당했네.

摳衣禮直相(구의예직상) 옷깃을 여미고 6조 진신상을 참례하고 나니

感動汨雨霰(감동멱우선) 감동의 눈물이 비오듯 사락눈 내리듯 하네.

借師錫端泉(차사석단천) 조사께서 석장을 꽂아 파놓은 남화사 뒤 탁석천 물로

洗我綺語硯(세아기어연) 실속 없이 미사여구나 늘어놓는 시를 쓰느라 사용한
                                           벼루를 씻어내고 다시 글을 쓰지 않겠노라.

<남화사(南華寺)>는 소동파가 남긴 많은 선시들 가운데 불교 신심이 가장 짙게 배어 있는 선시로서 그가 진정한 선수행자였음을 보여주는 ‘문자적 증거'다.

소동파는 시 · 서 · 화  3절(三絶)을 두루 갖춘 중국 문인 사대부 교양과 사상의 전형이다. 그는 송대 문인 묵희(墨戱)의 창도자요 실천가일 뿐만 아니라 문재(文才)와 호방함, 굴곡이 심한 인생 역정에서도 그를 능가할 자가 없다. 그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면서 겪는 입세와 출세, 집착과 허무의 모순 대립을 선적인 자아 해탈로 극복하고자 했다.

소동파는 스스로 “전생이 중이었다”고 말하기도 했고 황주에 유배돼 있을 때 쓴 <황주안국사기(黃州安國寺記)>에서는 “향을 피워놓고 말 없이 앉아서 자신을 깊히 성찰하면 곧바로 대상과 나를 다 잊고 몸과 마음이 텅비워진다”는 자신의 참선 삼매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론 보수 노선이었던 동파는 정치판의 투쟁과 모함 · 각축을 혐오했고 성격이 오만하고 호방하여 늘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면서 수심과 울분을 필묵 속에 용해시켰다. 그래서 그에게는 내심 표현의 작품이 많다. <남화사>도 이런 작품의 하나다. 이쯤에서 동양 사대부(지성인)의 표상인 동파의 선시<남화사를 >를 감상해 보자.

<남화사>는 송 철종 소성 원년(1094) 동파 나이 59세 때 왕안석과 대립하다가 선대의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로 남방의 영주(英州)로 좌천돼 갈 때 광동성 곡강현 마패진 조계촌의 남화선사(南華禪寺)에 들러 6조 진신상을 참배하고 읊은 시다. 남화선사는 남종선의 실질적 창시자인 6조 혜능대사의 행화 도량이며 현 한 · 중 · 일 선불교(선종)의 정통 법맥인 남종선의 조정(祖庭)이다. 동파는 영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또 다시 좌천돼 영원군절도부사(寧遠軍節度副使)로 혜주(혜주)에 유폐되고 공무에 참여할 권한을 박탈당했다. 그해 10월 2일 대유령을 넘어 어린 아들 소과(蘇過) · 왕조윤 등과 함께 혜주에 도착했는데 이 때 지나는 길에 남화선사를 찾아 새삼 경건한 선심(禪心)으로 정치에 대한 실의와 고뇌를 선가의 지혜를 빌어 초월하고자 했던 것이다.

세속의 고위 관직과 미사여구의 시작(詩作)에 매달렸던 어리석은 집착에 대한 회한을 토로하고 있는 소식의 시<남화사>는 오늘에도 거듭 되씹어볼 만한 소식이 있다. 첫 두 구는 남화사에 와서 6조의 진신상을 알현하고자 하는 목적이 동파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본래면목을 알고자 함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선종의 인생관을 통해 자기인식을 한번 새롭게 해보고자 한 것이다.

이시는 ‘본래면목' · ‘지월(指月)'등과 같은 선문 용어를 많이 사용한 깊은 믿음이 배어 있는 엄숙한 시다. 그가 불법과 선을 좋아했지만 이 때까지는 대체로 일종의 감상이고 음미였고 소탈한 응용이지 경건한 믿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화사>라는 선시에서는 자못 진지하고 절실하다.

‘본래면목'은 선림의 유명한 공안(화두)으로 혜능이 5조 홍인으로부터 조사 승계 신표로 전수 받은 의발을 가지고 남쪽으로 도피하던 중 그 의발을 뺏으려고 뒤쫓아 온 혜명학인을 대유령에서 만났을 때 가르쳐 준 ‘한 소식'이다. 명(明)상좌가 대유령에서 혜능에게 한 수 가르쳐 줄 것을 청하자 헤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때 어느 것이 명상좌의 본래면목인가?”

‘본래면목'은 인간 존재의 본바탕, 즉 분별의식을 떠난 무심을 상징하는 말로 불성 · 자성 등으로 표현 되기도 하는 청정한 본래 마음을 뜻한다. 외부 세계에 대한 갖가지 욕념과 번뇌를 벗어나야 비로소 본래의 청정한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이 본래 마음은 누구에게나 저절로 갖추어져 있지만 시시비비의 분별심과 갈등이라는 어둠에 가리워져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미망의 집착을 버리고 본마음으로 돌아오려는 스스로의 노력, 즉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다음 2개구는 6조탑 안의 혜능조사 육신상에게 ‘본래면목'을 참문하니 마치 6조가 살아 있는 생불처럼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라고 반문하더라는 상상적인 시상(詩想)을 담고 있다.

다음 5언 8구는 혜능조사의 물음에 대한 동파의 대답이다. 동파는 명상좌가 대유령에서 6조의 한 마디를 듣고 크게 께쳐 “이제 가르침을 받으니 사람이 물을 마셔보고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알듯이 잘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노(盧)행자(6조 혜능)는 저의 스승이십니다”고 했듯이 자신도 6조탑을 참배하고 금세 확철대오했음을 밝히고 잇다. 동파가 깨친 내용은《능엄경》의 “사람이 손으로 달을 가리켜 달(자성본체)을 깨닫게 하고자 할 때 손가락을 봐서는 안되고 달을 보아야 한다”는 지월(指月)비유를 인용, 선종의 득도 관건인 언어와 문자를 버리는 불립문자, 언어도단의 묘체 체득이다.

동파는 “지월무부현”(제8구)에서 자기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쳐다보는 식으로 과거엔 언어문자에 탐착했으나 이제는 손가락이 아닌 달을 곧바로 쳐다보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는 동파가 세상 풍진을 실컷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인생의 참뜻을 깨달아 이후로는 또다시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지 않게 됐음을 말한 것이기도 하다

이어 다음 두 구에서는 자신을 불교진리의 행렬 속으로 밀고 나가 원래 수행인이었으나 한 생각 차이로 본성을 상실해 일생 동안 무수한 시련을 겪었음을 말하고 있다.《6조단경》은 “한번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 반야가 끊어지고 한번 지혜를 떠올리면 반야가 생겨난다”고 했다.

시의 마지막 4개 구에서는 6조의 진신을 참배하면서 발원한 세속 풍진으로부터의 해탈을 펼쳐 보이는 구체적 행동을 전개한다. 그 행동으로는 혜능이 파놓은 남화사 탁석천(일명 구룡천) 물로 지금까지 아름답게 꾸민 교언영색의 실속 없는 말(시)을 적던 벼루를 닦아 냄으로써 다시는 시를 쓰지도, 글을 짓지도 않겠노라는 행동의지를 피력한다.

과거 정사를 논한 글과 말들 때문에 추궁을 당하고 견책을 받는 정치투쟁과 사회투쟁이 휘말렸던 동파는 오늘의 정치적 패배와 좌천의 원인을 불교적 ‘업장'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천태종의 지의선사는 “문자를 떠나는 것이 바로 해탈”이라고 했다. 동파는 선리(禪理)를 따라 오늘의 불행을 가져 온 업장인 문자를 동원해 글을 쓴 벼루의 먹물을 씻어내 해탈에 도달하고자 한다.

동파는 인생 행로에서 난관을 만나 망연한 가운데 선을 찾아 ‘자심청정'이라는 관념에 대한 의문을 풀고 괴로운 마음을 치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소식이 이처럼 선에 의지해 자신의 고뇌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동파라는 한 개인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고금을 관통하는 시대적 비극이기도 하다.

동파의 선사상은 반야공관에 입각해 세상 만사 모두가 가상이고 허환이라는 ‘일체개망(一切皆妄)'의 선지(禪旨)에 입각해 있었다. 따라서 동파는 이같은 선지를 펼쳤고 6조 혜능의 비문을 쓰기도 했던 당 왕유를 사숙했다. 이같은 선지는 하택선의 선사상이고 역시 6조 혜능의 또 다른 비문을 쓴 유우석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들 못지 않은 문명을 떨친 홍주선(일명 마조선 · 강서선)의 거사였던 백거이 · 위처후(대의선사 비문 찬자) 등은 선시에서 두두물물이 부처 아님이 없고, 삼라만상 하나 하나를 모두 불성의 체현으로 보아 각각의 개체적 가치를 인정하는 ‘일체개진(一切皆眞)'의 선지를 펼쳤다.

늘그막의 동파는 6조탑 앞에 서자 평생의 풍파가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침을느꼈고 옳고 그름, 성공과 실패는 고개를 돌리니 공허하고 앞으로 가야할 곳은 만리 밖의 야만 지역이니 생의 윤회를 거듭하는 느낌이었던 것같다. 일생을 돌아보니 중원에서 있었던 모든 일이 공일 뿐이고 환(幻)일 뿐이었다. 하지만 선가는 바로 이러한 공과 환을 어떻게 타파하고 극복할 지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6조의 진신상 앞에서 눈물을 비오듯 흘린 동파는 그 참되고 간절한 눈물로 인해 진정한 선수행자로 인정을 받게 됐고 선가가 가르치는 ‘초연인격(超然人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작가설명 : 소동파

소동파(1037~1101)는 사천 미산(미山) 사람으로 자는 자첨(字瞻), 이름은 식(軾)이고 동파는 호다. 아버지 순(洵)과 동생 철(轍)도 대문장가로 이들 3부자를 일컬어 ‘삼소(三蘇)'라 했고 동파는 당 · 송 8대가의 한 사람이다.

‘동파'라는 호는 황주로 좌천돼 갔을 때 친구의 도움으로 성 안에 있는 한 뙈기 버려진 땅을 얻어 개척해 식솔들의 식량을 해결했는데 이 밭뙈기에 동파라는 이름을 붙이고 스스로 ‘동파거사'라는 별호를 만든 데서 유래했다.

‘동파'는 동쪽의 성(東城)을 뜻하기도 하는 데 당 백거이의 시에 <보동파(步東坡)>라는 시가 있다.

동파는 독실한 선불교 신자로 선종 법맥도에도 여산 동림사 상총선사의 법사(法嗣)로 당당히 올라 있다. 동파는 36세에 항주 통판으로 자원해 나간 후부터 오월 지방의 선승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 참선 문도(問道)했고 선취 물씬한 많은 선시를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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