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태종 부흥시킨 고려 승려
⑨보운존자(寶雲尊者) 의통(義通)

중국 천태종의 제16조인 보운존자(寶雲尊者) 의통(義通)은 고려에서 건너간 승려이다. 중국 불교사에 이름을 남긴 우리나라 고승들이 적지 않지만 주요한 한 종단의 조사로 추앙된 이는 의통 외에 유례를 찾기 어렵다.

송대에 이르러 산일된 천태교적을 다시 모은 15조 나계 의적과 이를 토대로 천태의 교관을 널리 전한 16조 보운 의통, 그리고 이들을 저술로 남기고 정통 이론을 확립한 17조 사명 지례에 의하여 천태의 교관이 중흥하게 된 것이다.

중국 천태종의 제16조인 보운존자(寶雲尊者) 의통(義通)은 고려에서 건너간 승려이다. 중국 불교사에 이름을 남긴 우리나라 고승들이 적지 않지만 주요한 한 종단의 조사로 추앙된 이는 의통 외에 유례를 찾기 어렵다. 없어진 전적들을 다시 수집하여 천태교학 진흥의 계기를 마련한 나계 의적의 문하에 들어간 의통은 교학과 지관수행에서 뛰어난 경지를 이루어 쇠퇴한 천태종을 다시 부흥시켰다.

의통은 후삼국이 세력을 다투던 서기 927년에 태어났으니 정해(丁亥)생이다. 부친은 윤(尹)씨, 모친은 곽(郭)씨이며 자를 유원(惟遠)이라 하였다. 왕족이라고 된 기록이 있지만 부모의 성으로 볼 때 왕족은 아니고 큰 집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날 때부터 특이한 외모를 갖고 있었으니 정수리는 상투처럼 불룩 솟아있었고 펴면 길이가 5, 6치나 되는 흰 털이 양미간에 동그랗게 말려있었다. 부처님의 32상 가운데 육계()와 백호(白毫)상을 빼어 닮은 것이다. 일찍 구산원(龜山院)으로 동진 출가하여 석종(釋宗)을 은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구산원은 태조가 불교 진흥을 위해 개성 송악산에 창건한 구산사(龜山寺)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의통은 이곳에서 《화엄경》과 《대승기신론》 등을 공부하여 이미 주변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무엇이 부족하였던지 바다를 건너 중국의 오월 (吳越)지방으로 유학을 떠났다.

의통이 중국으로 건너간 시기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진(晋) 천복(天福)연간(936~943)에 중국에 왔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때는 아직 20세도 되지 않은 때이므로 부정확한 것으로 보이고, 그가 장년(壯年)에 건너왔다는 《보운진조집》의 기록과 37세 때인 서기 963년에 의적(義寂)이 그를 위하여 지관법문을 설해 주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후한(後漢)이나 후주(後周) 시대, 즉 30대 초반에 유학한 것이 아닐까 싶다. 또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한 때가 서기 936년이고 통일국가의 통치 철학으로서 천태종의 회삼귀일(會三歸一)을 필요로 하였다 하니 천태학을 본격적으로 익히기 위한 까닭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의통은 중국 명주(明州)에 도착하여 천태산 운거사(雲居寺)에 머물고 있는 덕소(德韶)국사를 찾아갔다. 덕소는 남종선의 일파인 법안종(法眼宗)의 제2조로 추앙되지만 천태교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서 잃어버린 불교 서적들을 오월왕이 해외에서 수집토록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인물이다. 덕소에게 선을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은 의통은 덕소의 천거로 다시 나계(螺溪)의 전교원(傳敎院)으로 찾아갔다. 이곳에는 2년 전 많은 교학서적들을 지니고 고려에서 건너온 제관(諦觀)과 이들을 바탕으로 활발하게 천태교학을 강설하던 천태종 15조 의적(義寂:919~987)이 머물고 있었다. 의적의 문하에 들어가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이치를 전해 받은 의통은 “원돈(圓頓)의 교학은 모두 여기에 있구나!”하고 감탄하면서 이곳에 오래 머물면서 천태의 교학을 익히는 한편 지관 수행에도 매진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의통이 수행의 큰 과보를 몸소 체득하였다는 사실이 사방에 알려졌다.

어느 날 의통은 도반에게 “나는 이 일심삼관의 도를 아직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데 꼭 부모의 나라에서 시작하면 좋겠다”고 말하고는 행장을 꾸려 동쪽 바닷가를 향해 길을 떠났다. 고려는 아직 천태종이 세워지기 전이어서 원돈의 교학과 지관을 본격적으로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명(四明)에 도착한 의통은 거기서 배를 타고 귀국하려 하였다. 그곳의 군수를 맡고 있던 전유치(錢惟治)가 의통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달려 왔다. 전유치는 오월국(吳越國)의 전(前) 왕인 전종(錢倧)의 맏아들이고 현 왕인 충의왕(忠懿王) 전숙()의 조카였다. 오대 십국 가운데 한 나라였던 오월은 전숙이 송 태종에게 나라를 바침으로써 사라졌지만 잃어버린 불교 전적을 해외에서 수집하고 탑과 절을 세우는 등 불교, 특히 천태종의 보존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한 나라이다. 일찍부터 명성을 듣고 있던 전유치는 의통을 예방하여 법문을 청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의통을 계사로 삼아 보살계를 받았고 이를 계기로 지역의 승려들과 백성들이 모두 의통을 스승으로 모셨다. 전유치는 의통에게 “이곳에 머무시거나 떠나시거나 제자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으나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에 꼭 고려여야만 합니까?”하며 머물러 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의통은 이에 “인연이 이미 그대와 닿았으니 어찌 거절할 수 있겠소”하고 말하고는 귀국을 포기하였다. 만일 이 때 의통이 귀국하였다면 고려의 천태종 개창이 1백여 년 앞당겨졌을 수도 있다.

송 태조 개보(開寶) 원년(968)에 조세징수와 양식출납을 담당하는 조사(漕使)직에 있는 고승휘(顧承徽)가 의통의 법문을 여러 차례 듣더니 자신의 저택을 희사하여 전교원(傳敎院)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이곳에 의통이 머물기를 청하였다. 의통은 청을 수락하여 전교원에 머물면서 널리 대중들에게 법을 전하였다. 11년 뒤, 의통이 53세일 때 훗날 천태 17조가 되는 법지(法智)존자 지례(知禮)가 스무 살의 나이로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 태평흥국 6년(981)에 제자인 연덕(延德)이 송의 수도 개봉(開封)에 가서 황제에게 사찰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송 태종 역시 이미 의통의 명성을 듣고 있던 터라 요청에 응하여 다음해에 보운선원(寶雲禪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려 주었다. 보운존자라는 의통의 호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절강성 영파(寧波) 지역의 사명산(四明山) 자락에 자리 잡은 보운선원은 훗날 명(明) 시대에 천하 10대 강사(講寺)로 꼽힐 정도로 명찰이 되니 이 모두 의통이 고려로 귀국하지 않고 법을 널리 편 덕택이라 할 수 있다. 이로부터 2년 뒤에는 훗날 송 진종(眞宗)에게 자운(慈雲)이라는 법호를 받게 되는 준식(遵式)이 22세의 나이로 문하에 들어온다.

의통은 평소 사람들을 부를 때 늘 ‘고향사람(鄕人)’이라고 하였다. 누가 그 이유를 물으니 “나는 정토를 고향으로 삼는데 모든 사람들이 응당 그곳에 왕생할 것이니 모두 내 고향사람인 것이다”하고 답하였다. 이후 수제자 지례가 중심이 된 산가파(山家派)의 문도들은 서로 ‘고향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의통이 보운사에 머물며 천태 교관(敎觀)을 세상에 편지 20년, 그의 가르침을 받고 일가를 이룬 제자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의 명성은 절동(浙東) 지역은 물론 멀리 수도에까지 미쳤다. 송 태종 단공(端拱) 원년(988), 병세를 보인 의통은 설법을 폐하였고 3일 만에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워서 입적하였다. 음력 10월 21일, 세수 62세였다. 다비를 하니 사리가 뼈 속에 가득하였다.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입적한 것이나 뼈 속에 사리가 가득한 것, 그리고 날 때부터 정수리와 미간에 육계상과 백호상 같은 상호를 지닌 것 등 의통의 행적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연상시키는 것이 매우 많았다. 다비를 마치고 문인들이 뼈와 사리를 수습하여 아육왕사(阿育王寺) 북서쪽 모퉁이에 장사하였다. 인도의 아쇼카왕이 전한 것으로 여겨지는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 있는 아육왕사는 보운사와 멀지 않아서 그곳 문도들이 의통이나 제자들을 강사로 초청하여 자주 설법을 듣곤 하였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이곳이 장지로 선택된 것이다.

의통은 《관경소기(觀經疏記)》와 《광명현찬석(光明玄贊釋)》 등 소수의 저서만을 남겼는데 그나마 오래 전에 산일되었다. 하지만 수제자인 사명 지례가 남긴 13부 29권의 저술은 사실 모두 스승의 설법에 의거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천태 대사가 입적한 뒤 침체되었던 천태종은 당 시대에 9조 형계 담연에 의하여 부흥을 보았다가 다시 암흑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송대에 이르러 산일된 천태교적을 다시 모은 15조 나계 의적과 이를 토대로 천태의 교관을 널리 전한 16조 보운 의통, 그리고 이들을 저술로 남기고 정통 이론을 확립한 17조 사명 지례에 의하여 천태의 교관이 중흥하게 된 것이다.

의통이 입적하고 77년이 흐른 뒤 남호(南湖)의 연경사(延慶寺) 주지를 맡고 있던 법손 문혜(文慧大)대사 종정(宗正)이 묘소가 황폐해진 것을 보고 주변에 석탑을 쌓고 석탑기(石塔記)를 지어 의통을 기렸다. 다시 60여 년이 흐른 송 휘종 선화(宣和) 7년(1125)에 아육왕사에서 주지를 하던 도창(道昌)이 의통의 묘가 황폐해지고 석탑도 무너져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프던 중 마침 풍수가 좋다고 부귀한 사람들이 탐내던 오석산(烏石山)에 자리가 있어서 의통의 탑을 옮기게 되었다. 이장을 위해 광을 파고 뼈를 햇빛 아래에서 향수로 씻으니 함께 있던 사리들이 청색이나 황색, 홍색, 백색 등으로 밝게 빛나면서 뼈 위에서 점점 불어나는 것이었다. 또 사리들을 두드리면 옥과 쇠가 부딪치는 것과 같은 맑은 소리도 났다. 당시는 아직 사리에 대해 잘 모르던 시대여서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처음 보는 장면”이라며 크게 환희심을 내었다고 한다. 이러한 영험은 후에 아육왕사의 주지를 맡은 지겸(智謙)이 석탑기를 중간(重刊)하면서 기록하여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지겸은 석탑기를 다시 새기면서 의통의 좌상(坐像)을 조각하여 안치하였다. 이후 법손(法孫) 종효(宗曉)가 1203년에 그의 행적을 한데 묶어 편찬한 《보운진조집(寶雲振祖集)》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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