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心似秋月(오심사추월)

吾心似秋月(오심사추월) 내 마음은 가을 달인가

碧潭淸皎 洁(벽담청교힐) 푸른 연못의 맑은 물인가

無物堪比倫(무물감비륜)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데

敎我如何說(교아여하설)어떻게 날 보고 말하라 하는가

- 한산(寒山)  -

  중 · 만당의 전설적인 선종 거사 한산(700~780 추정)의 유명한 선시다. 한산시 <내 마음은 가을 달인가(吾心似秋月)>는 선가의 게송 형식을 원용한 통속시이면서 선종이 애용하는 수월(水月) 비유법으로 선리(禪理)를 설파한 만고의 절창이다.
  외형적인 문맥상의 내용은 ‘내 마음은 가을 달도 아니고, 맑은 물도 아닌 데 비교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보라 하니 답답하기만 하구나' 정도로 풀어볼 수 있다. 푸른 연못의 물은 맑고 깨끗하다. 밝은 달빛도 맑고 깨끗하다. 때문에 연못 속에 비친 달 그림자는 격외로 교결(皎潔)하다.
  불가에서 월색은 해탈 무애한 심성의 청정교결을 상징한다.《대반열반경》(권5)은 “어떠한 것에도 걸림이 없는 해탈이란 한 점의 구름도 가림이 없는 둥근 보름달에 비유할 수 있다. 이같은 해탈자가 곧 여래다”라고 설하고 있다. 송대 시인 이단(李端)은 <기여산진상인(寄廬山眞上人)>이라는 시에서 “밝은 달 푸른 연못 빛은 공한 성품을 더욱 맑게 해주고, 고요한 밤 원숭이 우는 소리는 도심을 증명해 보여주네 (月明潭色澄空性 夜靜猿聲證道心)”라고 읊조렸다.
  선림에서는 청정무구한 본체 자성을 흔히 밝은 달, 허공, 밝은 거울 등에 비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로서도 궁극적인 본체 자성의 설명은 충분치 못하다고 안타까워 한다. 그래서 문자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하고, 말로서는 뜻을 다 드러낼 수 없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언부진의(言不盡意)를 강조한다.
  홍매(洪邁)는《용재사필(容齋四筆)》(권4) <노두한산시(老杜寒山詩)>조에서 한산의 이 선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한산은 吾心似秋月 碧潭淸皎 洁… 이라 했다. 이미 “가을 달”, “맑은 연못”과 같다고 말해놓고 곧바로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이는 그 두 가지 사물과의 비유를 통해서도 본래의 청정한 마음 자리를 드러내 보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독자들이 참구해야 할 몫이다.”
  홍매의 한산시 평은 한 수의 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로서 당시 사람들의 한산시 독해 풍조였다.
  한산시는 선불교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통속시체의 게송(선시)을 대표한다. 한산시체의 두드러진 특징은 전통 시가의 묘사법을 탈피해 선림의 게송과 같은 설리적(說理的), 훈유적(訓喩的)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산시는 선가의 게송을 원용한 선시를 많이 읊조린 왕유 · 백거이의 문학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선사상적 측면에서는 훨씬 신선하고 대담한 표현이 돋보이는 독특한 예술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 시의 의경(意境) 창조면에서 볼 때 한산은 왕유나 백거이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사상적 심각성과 신선함, 대담한 표현력 등은 한산시의 독특한 매력이다. 한산시는 깊고 미묘한 의경을 추구하지 않고 인생 현실에 대한 냉철한 관찰과 심각한 반성에 기초한 자신의 선학적 견해를 거두절미하고 직설적으로 표출한다. 이러한 냉철한 인식은 왕왕 분노와 풍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설리의 강변, 새롭고 날카로운 비유, 직절적(直截的) 권유 등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한산시가 선사상의 영향을 받은 구체적 사례를 두 가지만 살펴보자

蒸砂擬作飯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 하고
臨渴始掘井  목이 마르자 비로소 우물을 파네
用力磨碌?  아무리 애써 벽돌을 갈아도
那堪持作鏡  끝내 거울은 만들어지지 않나니

  위의 한산시 제 3 · 4구는 대표적인 선종 역사서인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5)에 나오는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과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의 전법 일화인 ‘마전작경(磨?作鏡)'이라는 고사를 전고(典故)한 것이다. ‘마전작경'고사는 마조라는 수좌가 남악 형산의 전법원에서 날마다 좌선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본 6조 혜능조사의 사법제자인 남악회양선사가 하루는 전법원 마당가에 앉아 종일토록 숫돌에 벽돌을 갈아댔다. 참선 중이던 마조가 남악의 거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다가가서 물었다. “그렇게 벽돌을 갈아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벽돌을 간다고 어찌 거울이 될 수 있습니까?” “벽돌을 간다고 거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자네도 참선만 해서는 부처가 될 수 없네.” 마조는 이 한 마디에 확철대오 하고 조사선(祖師禪)의 모태인 홍주선(洪州禪: 일명 마조선 · 강서선)의 개산조가 됐다.
  또 한산은 그의 시에서 마조의 조카 상좌인 약산유엄선사(751~834)의 유명한 법문인 “피부가 다 탈락한 후에야 오직 하나의 진실만이 남는다(皮膚脫落盡 唯有一眞實)”는 선구(禪句)를 그대로 인용하기도 했다.
  마조 이후 조사선이 성립되면서 부처 숭배는 ‘조사 숭배'로 전환되고 자성자오(自性自悟), 무수무증(無修無證)의 선사상이 풍미하는 가운데 인간 평등의 개성 존중과 개인 심성의 가치가 강조됐다.
  6조 혜능의 남종선이 기치를 든 반전통(反傳統) · 반권위정신은 마조의 ‘작용즉성'(作用卽性: 모든 행위가 다 불성의 현현이다)에서 완성돼 “일체중생실유불성론'을 다시 한번 강조했고 이같은 불성 평등사상을 등에 업은 당 전기 한문(寒門) 출신 신진 사대부들이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다. 유교의 권위주의와 봉건적 폐습을 청산하려는 남종선의 반항의식과 계급 타파운동은 한산시에도 그대로 옮겨졌다.
  한산시의 내용적 특징은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자오자증 · 무수무증의 선사상을 직절적,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는 불과(佛果)란 밖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연을 몰록 단숨에 끊고 망령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 무념 · 무심의 상태에 도달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한산시는 자연의 섭리를 따라 살아가는 임운수연(任運隨緣), 자유방광적 산림생활 등과 같은 선사상을 중요 주제의 하나로 다루고 있다.
  한산시의 시어들은 대체로 비속하며 소박하고 야하다. 한산시는 각종 어록에 나타나 있는 선사들이 사용한 구어 · 속어들을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 문인들도 그 신기함과 대담성을 찬탄해 마지 않았다.
  소동파는 한산시를 깊히 숙지하고 있었다. 그는 혜주에 좌천돼 있을 때 소주 정혜원(定惠院) 장로 수흠(守欽)이 모방해 지은 ‘한산시 10송'을 보내 평을 부탁하자 “시는 승찬 · 홍인조사를 관통했고 시에 아무런 걸림이 없으니 가히 한산에도 이르렀다”면서 8수의 시를 지어 화답해 주었다. 그는 또 자신의 다른 시에서 “한암옹(한산)을 기억함에는 마음이 가을 달처럼 맑다는 그 시구를 떠올리네(但記寒岩翁 論心秋月?)”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한산시 중의 “吾心似秋月...”구절을 가리켜 만고의 절창이라고 찬양한 것이다.
  소동파의 제자이며 강서시파(江西詩派)의 비조인 황정견(1045~1105 · 호 山谷)도 특별히 한산시를 좋아해 늘상 한산시를 붓글씨로 옮겨 쓰곤 했다. 그는 <재답병강국형제사수(再答幷康國兄弟四首)>라는 시에서 “묘한 언설을 토한 한산거사, 바로 유마거사이네. 열쇠도 없이 관문을 찰나간에 곧바로 투과하니, 봄바람을 만나지 못해 꽃이 피질 못하였네(妙舌寒山一居士 淨名金栗幾如?. 玄關無鍵直須透 不得春風花不開)”라고 읊었다. 시승 혜홍(1071~1128)은 《석문문자선(石門文字禪)》의 발문에서 “산곡(山谷)은 시를 논하면서 한산은 도연명에 버금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한산시에 대한 찬탄과 탁견의 평은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한산시는 당대(唐代)의 한산이라는 실존 인물로부터 형성되기 시작해 송대에 같은 부류의 다른 사람들 시까지 모아 완성됐다. 당대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송대에 들어서면서 선림에 널리 유포되고 문단의 주목을 모았다. 한산시의 풍미는 선종어록과 게송이 정리돼 송대 사상과 시풍(詩風)에 큰 변화를 일으킴과 때를 같이 했다. 선사상은 송대에 이르러 사회생활의 각 방면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고 성리학 형성에도 깊숙이 관련됐다. 선사상을 중요 내용으로 한 한산시는 이런 풍조를 따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당 · 송대는 물론 원 · 명 · 청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사들이 한산시를 들어 상당법문을 하고 법거량을 했다. 특히 “吾心似秋月”은 많은 선승들의 상당법어에서 단골 메뉴처럼 수시(垂示)됐다. 뿐만 아니라 왕안석 · 육유 · 장자 · 우집 같은 문인들도 한산시를 한껏 높이 평가했고 성리학의 대가 주희(朱喜)는 “만년에 한산자(寒山子)의 시를 좋아해 취했다”면서 제자들에게 한산시를 주목하라고 당부했다.


<한산자>
  송대에 이르러 비로소 불문 제자로 확정된 한산은 8세기말-9세기초의 실존 인물로 출세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졌던 신진 사대부였다.
  그는 유교-도교를 거쳐 끝내는 불교 선종에 귀의해 날카로운 필치로 사회를 비판하고 사람다운 삶의 길을 제시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성인 반열에 올라야만 붙이는 경칭인 ‘자(子)'가 붙어 한산자(寒山子)라 불리웠다.
  후대에 많은 전설이 덧붙여진 한산자는 불교에 귀의하면서 천태산 국청사 서남쪽 70리에 있는 한산의 한암(寒岩) 동굴에 살았고 국청사 스님 풍간 · 습득과 교유해 이들 세 사람을 묶어 ‘국청삼은(國淸三隱)'이라 했다. 태주(台州)자사 여구윤(閭丘胤)이 나무 · 바위 · 담벽에 써놓았던 한산자의 시와 습득의 시를 모아 《한산자시집》을 발간했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여구윤은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에 시집에 있는 그의 <한산자시집서(寒山子詩集序)>는 위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정설이다.
  따라서 ‘한산시'는 한산자의 시만을 뜻하는 게 아니고 시에 선가의 게송을 접목시킨 뛰어난 통속시들을 묶은 통칭이라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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