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아
기복과 물량 탐욕의 불교
‘버림의 미학’ 되살려야

어느 사회학자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 우리는 30년 전보다 300배 더 잘산다는 설명이 있다. 어느 정도 정확한 수치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잘 사는 것은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나는  힌국전쟁 때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그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뇌리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부산 피난 시절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가 9.28 수복 때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 서울 시내에서 유일하게 번쩍이는 불빛을 볼 수 있는 곳은 반도호텔과 부서진 화신 백화점이 전부였다. 학교 가는 길목은 상이군인, 부랑자, 걸인들로 넘쳐 났다. 풍요라는 낱말의 뜻도 몰랐던 시절이다.

불교집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1965년 대불련 수련대회가 무량사에서 열렸는데. 발우공양 때 이틀에 한 번쯤 두부가 보였다. 상석에서 일인당 두 개씩으로 제한하지 않으면 몇 차례 지나서는 빈 그릇이 십상이다. 그 해 겨울에는 울진의 불영사에서 한 철을 났는데, 아침에는 감자를 쪄 먹고, 점심 때는 감자를 구워서, 저녁은 감자를 으깨서 먹고 석 달을 지냈다.

지금 우리는 가난 대신에 풍요를 걱정하게 되었다. 내가 불사(佛事)라는 이름에 이유 없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이 과거의 빈곤이 빚어내는 무의식적인 반응일는지 모른다. 지금 불교는 우리 사회처럼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다. 입으로는 버릴 것을 말하면서도 몸은 풍요 속에 노닐고, 머리로는 청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실로는 그 반대의 삶에 탐닉하고 있다.

행복은 결코 물질적 만족에만 달린 것은 아니다. 인간은 빵 없이도 못 살지만, 빵만으로도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정신과 물질의 조화, 불교적으로는 이사무애(理事無碍)가 목표이다.

우리는 기업이고, 가정이건 간에 온통 발전하고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리고 있다. 발전만을 추구하다 보니, 현상유지나 퇴보를 견디지 못한다. 좌절을 겪지 않는 인생은 행복이 아니라 불쌍한 삶이다. 불교가 추구해야 할 가치관은 이 중생들의 끝없는 물욕을 채워주는 일이 아니라 ‘버림의 미학’, 무애와 달관의 멋을 가르치는 일이어야 한다고 본다. 또 승가는 검약과 절약의 교육적 모델이 되어야 한다.

연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틱낫한은 현대 승가의 율장을 새롭게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첫째 스님들의 개인 컴퓨터(노트북)를 못 갖게 하자는 것, 둘째 컴퓨터의 게임에 빠지지 말 것, 셋째 자동차의 크기를 제한하자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의 예처럼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율(律)의 제정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승가는 과거에 비해 지적 권위를 뺏기고 글로벌한 감각을 잃었지만 여전히 불교의 저력으로 남아 있는 힘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도덕적 청정성’이다. 독신을 지키면서 육식을 삼가고, 새벽 3시에 일어나는 일상을 숙명처럼 반복하는 힘, 수행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고결한 인생, 의연하게 세속의 번잡을 응시하는 출세간적 기품 등이 우리 승가의 보이지 않는 힘이다.

부처님은 부다가야에서 대각을 얻으신 후, 이 깨달음을 세상에 전할까 말까를 고민하신 흔적이 있다. 마침내 진리의 법음을 전하기로 결심한 부처님은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이 어둠의 세상에 죽음 없는 진리의 북소리를 펴리라.” 이 풍요로운 세상 속에서 불교는 의연히 내면의 완성을 추구해야 한다.

 정 병 조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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