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스님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펴내

2000년 봄, 백양사 운문암에서 동안거 해제를 하고 미황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아침. 아랫마을 노보살이 밥해주러 와서는 “시님 오셨소. 그나저나 축하하요. 주지 스님이 어제 떠나면서 ‘인자 금강 스님보고 주지 스님이라 하시오’ 했당께요.” 갑자기 아득해졌다. 지난 겨울, 선방에서 유달리 공부가 잘돼 ‘뿌리를 뽑으리라’ 마음먹었던 참인데……
 - 본문 중에서

해남 미황사 주지를 10년째 맡고 있는 금강 스님이 이판(수행승)의 길을 포기하고, 사판(포교와 행정 담당 승려)의 길로 들어서게 된 이유다. 궁벽한 산골 작은 절을 연평균 템플스테이 참가자 5천명, 방문객 10만 명의 유명 사찰로 바꿔놓은 금강 스님이 첫 에세이집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을 펴냈다.

미황사 주지로 살면서 겪은 감회를 월간 ‘불광’에 2년 간 연재한 글 모음이다. 1월 18일 조계사 인근에서 만난 스님은 “한국불교의 가장 큰 재산은 천 년 역사를 가진 고찰”이라 말했다. 산중 고찰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찰의 주인은 마을주민이고, 모든 사람은 사찰의 반가운 손님이라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황사가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 데는 산사음악회와 한문학당의 역할이 컸다. 그렇게 특이한 행사가 아님에도 유독 미황사가 입소문을 타게 된 까닭은 미황사를 다녀갔던 사람들이 느낀 감회가 유달랐기 때문이다.

금강 스님은 절을 찾아오는 사람이면 가리지 않고 차 한 잔을 함께 한다.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낮선 이들과 마주앉아 차를 마시는 일은 힘든 고역이지만 스님은 묵묵히 이 일을 한다. 스님은 “처음 절을 찾은 사람에게 절은 낯선 공간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건네는 한 잔의 차가 절과 그들을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된다”고 말했다. 요즘도 스님과 차 한 잔을 나누려는 사람들이 방문 앞에 줄지어 선다.

미황사와 마을 주민 간의 유대 역시 별스럽다. 스님은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인근 마을 이장이 안내방송을 해서 주민 동참을 권유하는 지역은 미황사 뿐일 것이다”고 말했다. 마을 부녀회도 팔을 걷어붙이고 절 일을 돕는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금강 스님이 20년 전 은사 스님을 따라 처음 미황사를 찾은 이후 지금까지 매년 당제(堂祭) 때마다 염불을 해주는 등 마을 주민과 함께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폐교 위기에 처한 마을 초등학교 분교를 살려내는 일에도 앞장섰다. 학생을 늘리기 위해 스쿨버스까지 마련했다.

책에는 이렇게 마을 주민에 대한 스님의 사랑이 곳곳에 묻어난다. 한 스님이 한 사찰에서 살며 겪은 진솔한 이야기지만 그 이면에는 모든 사찰과 모든 스님들이 새겨야 할 수행과 포교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녹아있다.

해남에서 태어나 17살에 대흥사 지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금강 스님은 중앙승가대를 졸업하고, 전국불교운동연합 부의장과 범종단개혁추진회 공동대표를 맡아 94년 종단개혁을 도왔다. 백양사 서옹 스님을 모시고 참사람운동을 기획한 바 있으며, 현재 조계종 교육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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