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의 깨달음 역사와 연결돼야”

해인사 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복사본을 만들어 돌려보던 책이 있었다. 1990년 해인사출판부에서 발간한 《깨달음과 역사》란 책이다. 당시 출판부장이었던 법연 스님이 1980년대 중후반 각종 매체에 게재된 현응 스님의 원고를 모은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책은 절판됐지만 학인스님들은 복사본을 만들어 돌려보았다.

책이 발간된 지 약 20년 만에 개정판이 나왔다.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출판사(불광출판사, 13,800원)만 바뀌었다.

20여 년 동안 끈질기게 이어온 생명력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 ‘뜰 앞의 잣나무’나 ‘마른 똥막대기’만을 외치지 않고 치열한 ‘현실’에 뿌리를 굳건히 내린 채 ‘사회과학’이라는 현미경으로 면밀하게 불교와 역사와 철학을 조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스님 삶의 이력과도 맞닿아 있다. 스님은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강사를 역임하기도 했지만, 1994년 조계종 개혁회의 기획조정실장을 맡았고, 대승불교승가회ㆍ선우도량ㆍ실천불교전국승가회 등에서 활동하며 종단 개혁과 사회 참여 선두에 섰다.

따라서 스님에게 깨달음이란 선방의 좌복이 아닌 다급한 현실에서 찾을 수 있는 역사의 근간이다. 여기서 깨달음이란 변화와 관계성의 법칙을 깨닫는 것, 삼라만상이 서로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깨달음의 세계란 절대적인 가치체계에 종속되지 않는 열려진 적극성이며 변화를 지향하는 역동성이다.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를 지향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이상형은 보디사트바(보살)다. 스님은 책에서 보살을 이렇게 설명한다.

“보디사트바란 ‘깨달음(보디)’과 ‘역사(사트바)’의 합성어입니다. 보살은 깨달음을 얻어 역사로부터 자유로움만 만끽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교섭하도록 적극 참여해 그 자신을 투사시켜야 합니다.”

스님은 깨달은 사람이 깨달음의 영역에 자족하지 않고 역사의 길에 나서는 것은 존재에 대한 사랑(慈)과 연민(悲) 때문이며, 자비야말로 역사적 행위의 원동력으로서 깨달음과 역사를 묶어내는 고리라고 강조한다.

현재 스님 소임은 조계종 교육원장이다. 스님에게 무겁고 불편해 보인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종단 개혁을 했던 것처럼 승가교육제도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 기대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이 책에서 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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