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민정음 창제와 실용에 대한 재검토 -

훈민정음, 한글이 새로운 문화세기에 이르러 세계적 문자로서 각광을 받고, 국내외로 활용되는 추세가 고조되면서, 그 창제와 실용의 과정이 재검토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훈민정음은 천종지성이요 천재적인 세종이 오직 혼자서 창제하였다거나  집현전 학사 정인지와 신숙주·성삼문 등이 협력해서 창제하였다는 게 정설로서 상식화되어 있는 터다. 그런데 여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르고 모순점이 없지 않기에 재고할 여지가 있는 게 사실이다. 최근에 훈민정음 창제ㆍ실용의 과정을 불교적 관점에서 검토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이 문제를 불교문화학적으로 고찰하여 순리적이고 합리적으로 풀어 가게 되었다.

조선 초기 숭유배불의 국시와 정책에 따라 배척ㆍ혁파된 불교계의 주체들은 목숨을 걸고 불교중흥과 불교왕국의 재건을 위하여 왕실과 손을 잡고 세종을 20년 이후에 숭불주로 전환시키고, 수양대군을 숭불세자로 옹립하여 장차 숭불국왕으로 등극하기를 내정ㆍ발원하였다. 이를 실현하는 대방편으로 당시 국어에 맞는 자국 문자를 창제ㆍ실용하여 국문불경ㆍ불서를 제작하였다. 이에 세종이 총체적 책임자로서 수양대군을 총괄적 주관자로 삼고, 당대 불교계의 주체인 신미와 수미ㆍ학조 등을 전문적 실무자로 지목하여 극비리에 불교적 문자를 창제해 내니, 그것이 바로 세종 어제 훈민정음이었다.

훈민정음 불교계 문자로 창제
불교문화 발전사와
상관성 논의 활성화 돼야

훈민정음이 세종 25년 12월 하한에 공표되니, 왕은 창제ㆍ실용의 명분을 대내외에 강조하고, 조정ㆍ유교계에서는 최만리 등을 내세워 반대ㆍ무용론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왕실ㆍ불교계에서는 훈민정음의 원본을 즉각 수용ㆍ언해하여 문자를 학습하는 교재로 활용하면서, 바로 세종의 책임과 수양대군의 주관, 신미 등 학승들의 전문적 실무에 의하여 정음불경,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찬성ㆍ유포시켜 불교중흥의 기틀을 잡았다. 이어 수양대군이 숭불국왕, 승왕으로 즉위하면서 수미 등을 시켜 정음불경, 월인석보 전25권을 집대성하였고, 국가기관으로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모든 대승경전을 언해해 냄으로써, 실질적인 불교왕국의 재건을 성취해 내었다.

이에 반하여 조정ㆍ유교계에서는 적극적인 반대ㆍ무용론을 더욱 강화하면서, 세종의 엄명에 의하여 집현전 정인지와 신숙주ㆍ성삼문 등이 훈민정음해례본을 완성하고, 세종 28년 9월 하한에 반포하는 데서 머물렀다. 그리고 그들은 세종의 어명에 따라 중국운서를 정음으로 주음하고, 동국정운을 편찬하여 명나라에 정음 창제의 명분을 세워 주었을 뿐 한자음을 조정, 유교계의 어떤 문헌에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이를 불경언해 쪽으로 넘겨 주고 말았다. 나아가 그들이 어명에 의하여 용비어천가를 찬성하는 데서도 전10권의 한문주석ㆍ해설사화 속에 겨우 125장의 주음 없는 국한문 가사를 지어 넣었을 뿐이었고, 삼강행실도의 언역도 일부 어명에 대한 체면만 세웠을 정도였다.

그러기에 훈민정음은 불교계의 문자로 창제된 이래, 적어도 15세기까지는 조정ㆍ유교계와 대립하여 불교와 불교문화를 중흥ㆍ선양하는 데에 주로 실용되어 온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처럼 훈민정음 창제ㆍ실용의 과정이 올바로 밝혀지면서 훈민정음 발달사와 불교문화 발전사의 상관성이 무리없이 합리적으로 파악되리라고 본다. 향후 이 방면의 논의가 보다 본격적으로 전문화되고 더욱 정밀하게 활성화되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사 재 동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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