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의 밝음을 편애하면 색채에 빠지게 되고, 청각의 밝음을 편애하면 소리에 탐닉하게 되고, 인(仁)을 편애하면 덕을 어지럽히고, 의(義)를 편애하면 도리에 어긋나고, 예(禮)를 편애하면 기교만 조장하고, 즐거운 음악에만 빠지면 음탕함을 조장하고, 성(聖)을 편애하면 속된 기예를 조장하고, 지식을 편애하면 옳고 그름의 병폐를 불러들인다. 가령 천하의 백성들이 저마다 본성을 지킨다면, 이 여덟 가지 폐단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그러나 온 천하의 백성이 각기 그 본성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 여덟 가지 폐단은 사람을 얽매어서 천하를 혼란에 빠트리는 주된 원인이 된다. 이렇듯 천하를 어지럽히는데도 사람들은 이것들을 존중하고 아끼니, 심하도다 천하의 미혹됨이여! 게다가 그냥 지나쳐 버리면 그만인데도 목욕재계한 뒤 그것을 말하고, 꿇어앉아서 그것을 바치고, 북 치고 노래하면서 그것을 찬미하니, 내 이를 어찌하겠는가?”    
                                                                                        - 『장자』외편 「재유」 -

인간은 감관을 통해 세상을 만난다. 감관은 인간을 세상의 광활함과 진실로 이끄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진리를 왜곡하고 인간을 속박하는 덫이기도 하다. 감관을 통해 만나는 대상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감관이 축복이 되기도 하고 재앙이 되기도 한다. 감관의 대상을 편애하게 되면 곧 그 대상의 노예로 전락한다.

어느 한 감관을 편애하면 그 감관으로 만나는 대상 세계에 탐닉하게 되고, 그러한 탐닉은 곧 노예적 종속 상태로 나아가 마음의 자유를 상실한다. 시각을 편애하면 색채의 노예가 되고, 청각을 편애하면 소리의 노예가 된다.

눈이나 귀와 같은 유형적 감관과 그 대상에 대한 편애뿐만 아니라, 어짐, 의로움, 예절, 성스러움, 지식과 같은 무형적인 것에 대한 편애 역시 삶을 해친다. 인(仁)을 편애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편애한다는 것이다. 자기 가족, 자기 가문, 자기 지역만 편애하게 되면 다른 가족과 다른 가문, 다른 지역을 배타하여 포용하지 못하게 된다. 인을 편애하면 포용의 덕을 상실케 되는 것이다. 의로움을 편애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자기 기준만을 편애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자기 잣대만이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이라고 편애하는 사람은 삶의 진실을 놓치게 된다. 의로움을 추구하다가 오히려 도리를 등지게 되는 것이다.

예절을 편애하게 되면, 마음과 같은 내용보다 외형적 형식을 중시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럴듯한 말과 몸짓으로 외형을 꾸미려는 기교적 사고 방식이 득세하게 되고, 그 결과 내용 없는 공허한 수식과 허위가 넘쳐나게 된다. 성스러움과 같은 종교적 가치를 편애하게 되면, 성스러움을 권력 삼아 속된 이익을 추구하는 기만이 머리를 든다. 성스러움을 가장하여 오히려 저속한 욕망을 채우려는 위장극이 펼쳐지기 쉽다. 지식을 편애하면 시시비비의 분별과 다툼이 횡행한다.

모든 편애에 함몰되지 않는 마음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본성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본성 자리를 놓쳐버린 인간들로 가득한 세상은, 편애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찬미하다못해 자못 엄숙하게 실행하기조차 한다. 편애를 미화하고 진지하게 행하는 자들이 도처에서 지도자 노릇을 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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