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켜면 연예인들의 노는 장면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과 축사에서 짐승처럼 살아가는 장애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다큐 프로그램이 보인다, 시청자들이 깔깔거리고 웃거나 눈물을 찔끔 질끔 흘리라는 것이 그 의도이다.

다큐 프로그램의 단골 매뉴는 장애인이다. 장애는 눈에 확 뜨기 때문에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고통이 설명하지 않아도 시각적으로 전달이 되기 때문이다.

저렇게 장애가 심한 사람이 어떻게 아기를 낳았을까?

온집안 식구가 모두 지적장애인일 수도 있구나?

안보이는데 어떻게 마라톤을 할까?

TV 앞에서 사람들은 이런 호기심으로 감동을 한다. 그리고 모금 프로그램에서는 또 다른 감동으로 시청자들을 자극한다.

가난과 장애 그리고 죽음까지 보태져 완벽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런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사람들은 절망에 감동하기 때문이다.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물고기를 잡아주기 보다
잡는 법을 알려주자

사회복지사가 후원자를 데리고 지원 대상자 선정을 위해 가정 방문을 갔을 때 후원자들이 선호하는 것은 최대한 더럽고 최대한 상태가 나쁘고 최대한 고통에 찌든 표정을 짓고 있는 가정이다.

살아보겠다는 의욕으로 집안 청소를 하고 깨끗이 목욕을 하고 단정한 옷을 입고 밝은 표정으로 후원자를 맞이하면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가정은 잘 살고 있네요. 옷도 나보다 이쁘게 입었던데요?”

사회복지사는 그럴 때 가장 난감하다. 첫 방문 가정은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여서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이고 두 번째 방문 가정은 적어도 자기 자존감을 지키며 위기에서 벗어나보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인데 후원자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절망에 감동할 뿐이지 절망에 빠진 사람의 손을 잡아주어 일으켜세워줄 의도는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회복지사들은 클라이언트 가정을 방문해서 삶의 의욕을 갖고 도전해보라고 권한다. 세상은 노력하는 사람을 위해 열려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도울 것이라고 희망을 준다.
하지만 지원은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보다는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돌아간다. 그 지원의 목적은 생명을 유지하게 하기 위함이지 절망에서 벗어나 뭔가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아줄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먹고 남으면 그것을 가장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자선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물고기를 잡도록 해주어야 생산적인 기부가 된다. 그래야 당사자들도 얻어먹는다는 굴욕적 관계에서 벗어나 당당해질 수 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당당함인데 사람들은 그 당당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얼마전 텔레비전에 장애인이 나와 노래를 불렀다. 조금 전까지 박장 대소를 하던 연예인들이 숙연한 표정을 짓더니 급기야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눈물이 언론을 도배했다.

사람들은 절망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우리 나라의 기부 문화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방 귀 희
솟대문학 발행인,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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