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  도 산 종의회의장

참회는 화합의 시작입니다.
지난 12일 광주 5.18민주 묘지에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묘지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찾아 와 머리 숙여 참배를 올렸습니다. 묘에 안장된 이는 명예회복을 하지도 못한 채 올 7월 25일 한 많은 삶을 접은 일제 강점기 ‘근로정신대’ 출신 김혜옥 할머니였습니다. 이 묘를 찾아 할머니의 넋을 기린 이들은 다름 아닌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일제 위안부 할머니를 돕고 있는 일본인들로 구성된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 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소속 회원들이 우리나라의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과 나란히 김혜옥 할머니의 묘에서 눈물을 떨어뜨렸습니다.

현재 일본의 일부 사람들은 일제 시절 강제로 동원돼 꽃다운 나이에 희생당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삶에 용서를 빌고자 근로정신대 소송 공동변호인단을 꾸리는가 하면 소송지원회를 발족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날도 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다카하시 마코토 회장은 “오늘 내리는 비는 김혜옥 할머니의 눈물”이라며 깊은 애도를 표시했습니다. 일본인들이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찾은 것은 올해가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해에도 한국을 찾아 그들은 깊이 머리 숙여 잘못을 빌었습니다.

몇 달 전 세계경제의 위기와 관련 미국의 유명 금융업계 또는 재계의 경영주(CEO)들이 상원의원들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는 장면이 세계전파를 타고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질책 받은 이유는 세계경제의 위기상황을 불러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반성은커녕 위기상황이 지속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고액연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미국 정치계는 그들의 도덕불감증을 크게 나무랐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음에도 시정하려 하지 않는 행태는 인간사회에서의 커다란 해독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일러 후안무치하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뻔뻔스럽다’는 것인데 인간으로서 상종할 수 없는 부류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잘못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과 실수를 저질렀을 때 재발되지 않도록 자신을 추스르고 새로운 마음 다짐을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은폐하려 하고, 그것을 단지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과소평가하여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실수와 잘못은 언제든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실수와 잘못이 누적되고 반복된다면 그것은 사소한 원망과 대립을 낳게 되고 그로 인해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 사회에서의 갈등과 대립은 이렇게 야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잘못과 실수가 없도록 점검하는 일이 중요한데 이를 불교에서는 ‘참회’라 합니다.

참회는 범어 ‘크샤마야(Ksamaya)’에서 온 말로 범어와 한자의 합성어입니다. 본래의 뜻은 ‘참고 용서를 빈다’인데 ‘뉘우침’의 의미가 가세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빈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참회도 그 정도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3품(三品)이라 하여 상중하로 구분합니다.
첫째 상품참회는 온 몸의 털구멍과 눈에서 피가 나도록 잘못을 구하는 것이며, 둘째 중품참회는 온 몸에서 땀이 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하품참회는 온 몸에서 열이 나고 눈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일반사회에서는 하품참회만 하더라도 그 진정성을 높이 쳐줄 것입니다. 그런데도 국민에게 큰 죄를 지었어도 누구 하나 하품 흉내조차 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잘못을 은폐하고자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되니 철저히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모르쇠’가 통할 경우 그 사람은 훗날 반드시 그 문제를 또 다시 일으키는 주범으로 국민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이런 경우는 허다하게 봐왔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진정한 참회가 없으면 잘못과 실수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는 교훈입니다. 따라서 참회를 단순히 종교의식으로만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교육을 비롯한 일상생활에서 참회하는 의식과 문화가 정착될 때 사회는 보다 건강하고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참회는 형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참회는 진정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스스로에게 다짐해야 그 효과를 발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에서도 참회를 단지 죄의 고백 정도로 여기지 말고 용서를 통하여 다시금 기회를 주는 풍토가 조성돼야 합니다. 사람의 품성을 바로 찾고 그에 알맞은 훌륭한 제도를 만들어 나가는 것, 참회는 그 하나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참회는 인간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힘을 지녔습니다. 그 마력의 효과와 영험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어떻게 운용할 것이냐의 열쇠는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져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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