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에워싼 주위환경도 많이 변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60년대 초반만 해도 도심의 포교당이나 재가신행단체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볼 길이 없었다. 불교하면 떠오르는 것이 아낙네들의 불공, 갈등과 분쟁, 은둔과 자조였다. 그러나 이제 불교는 오히려 대형화에 따른 부실을 염려해야 하고 상업화에 스며들지 않도록 걱정해야 할 정도로 놀랄만한 양적 팽창을 이루어 왔다. 국가만 경제발전을 이룬 것이 아니다. 불교 집안 역시 엄청나게 잘 살게 변모한 것이다.

과거 불교가 가난했던 시절에는 ‘현대화’가 우리의 목표였다. 7~80년대의 불교 세미나는 거의 산업화, 현대화가 주제였다. 나 역시 그 비슷한 제목의 논설을 십 여 편 이상 기고하였다. 이제 아파트 숲 속에도 어김없이 절 卍자가 눈에 띄인다. 불교방송에서는 조석 예불의 낭랑한 화음이 울려 퍼지고, 불교TV에서는 명 법문, 놓치기 아까운 영상들이 즐비하다. 불교강좌의 수준 또한 갈수록 높아져서 이제는 입문, 개론으로는 어림도 없다. 완결된 것은 아니지만 이제 불교 또한 상당히 현대화 되었다고 자부한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불교가 지향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나는 그것을 국제화와 생활화라고 보고 있다. 사실 한국의 휴대폰이나 자동차가 세계를 누빈다는 사실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1982년 여름 오레건의 사막에서 현대차 포니를 본 적이 있다. 우리 일행은 너무나 감격해서 그 차에게 차선을 양보하였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동차를 향해 머리를 숙이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지금 우즈벡에서 굴러다니는 자동차의 8할은 대우차 마티즈다. 인도에서는 아토스(현지에서는 싼토스)가 주종이다. 태국이나 월남에서는 버스, 승용차가 곧 선진의 상징이다. 그에 비해 보면 한국불교의 세계화는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세계 어디를 가도 티벳불교, 일본·중국불교만이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앞으로 불교학계, 종단, 정부는 이 글로벌 불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무조건 내 것을 내세우는 민족주의로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뿐이다. 합리적인 시안, 신심있는 추진력이야말로 한국불교 세계화의 전략일 수 있다.

불교 외형적 현대화
교리의 실천 통한
국제화·생활화 이어져야

또 미래의 불교는 갈수록 승속(僧俗)의 경계가 희미해 질 전망이다. 출가와 재가의 적절한 역할분담이야 있겠지만, 중생제도의 서원에 있어서는 구분이 있을 수 없다. 과거 출가자들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서양사회에서 교황청이 군왕의 권좌 위에 군림한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왕사니 국사니 하는 제도들이 있어왔다. 그 까닭은 출가수행자들이 모든 방면에서 국가경영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는 엘리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이 종교의 권위는 철저히 붕괴하고 말았다. 우주적 상상력은 이제 과학의 몫이다. 지적(知的)인 권위는 모두 대학들이 앗아 갔다. 이제 종교에게 남은 것은 도덕적 청정성의 영역 정도이다. 따라서 다변화해 가는 미래사회의 정신적 상황은 종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내면의 평화, 물질과 정신의 조화 그리고 삶 자체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쪽으로 불교의 교리를 재해석해야 한다. 결국 미래의 불교는 응용불교(Applied Buddhism)가 될 수밖에 없다.

화엄이나 천태의 교관(敎觀)을 외우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그것을 우리의 현실 속에 용해시키는 작업이다. 이제 우리들의 생각도 변해야 한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는 이기적 기복 심리 대신에 보살정신으로 재무장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정 병 조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