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사제(四諦)

사제는 부처님이 처음 설한 가르침
괴로움과 그 소멸 조직적으로 설해
지의는 성문승 위한 가르침으로 봐

지의는 미혹의 현실을 깨달음의 세계로 변화시켜 나가는 방법으로서 계·정·혜 삼학(三學)을 설하고 있다. 먼저 계학(戒學)으로서 삼귀의와 오계를 설한 다음, 정학(定學)으로서는 사선·사무량심·사무색정 등의 세간선을 비롯해 구상·팔배사·초월삼매 등의 출세간선까지 설하였다. 즉, 계와 정은 각각 깨달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바른 생활과 바른 집중의 마음공부이다.

지금은 그것을 행하는 과정에서 체득하게 되는 바른 지혜[慧學]를 설한다. 바른 지혜로서는 사제(四諦)·십육행(十六行)·생법이공(生法二空)·삼십칠품(三十七品)·삼해탈(三解脫)·삼무루근(三無漏根)·십일지(十一智)·십이인연(十二因緣)의 여덟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지금은 첫 번째 사제에 대한 설명이다.

사제초문 제33(四諦初門第三十三)

초월삼매 다음에 사제를 밝힌다. 지금까지 설한 무루선들은 모두 사제를 살피는 지혜가 있지만, 다만 선정을 닦는 방법을 주로 밝혔다. 그러므로 이치[理]는 감춰지고 수행의 방법론[事]만 나타나니, 마치 주머니 속에 보배가 있어도 꺼내서 보여주지 않아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이제 여러 선법들 다음에 사제(四諦) 등 여덟 과목의 지혜를 행하는 법문을 밝히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모두 ‘제(諦)’라고 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제(諦)’는 ‘진실을 살핀다’는 뜻이다. 이 사제법문은 바로 성문인(聲聞人)이 듣고서 지혜가 생겨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므로, 반드시 이 사제의 가르침[敎]을 의지하여야만 이치[理]가 드러나게 된다. 지금 이 가르침과 이치가 허망하지 않음을 밝히므로 ‘진실을 살핌’이라고 한다.

나쁜 행위 뿐만 아니라
착한 행위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선법까지 모두 괴로움의
원인이 될 수 있어


‘사제’ 즉 ‘사성제(四聖諦)’는 부처님이 가장 처음 설하신 가르침이다.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바로 이 사성제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비로소 불교가 시작됐다. 또한 사성제는 부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잡아함경》에서, ‘나는 오로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만을 말한다’고 설하였다. 괴로움과 그 소멸을 조직적으로 설해보인 것이 바로 이 ‘사성제’의 가르침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성제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포괄한다. 그 뜻을 《잡아함경》 〈상적유경〉에서는, ‘코끼리의 발자국은 커서 다른 모든 짐승의 발자국이 다 그 속에 들어가듯,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다 사성제에 거두어진다’고 말하였다.

지의는 다섯 비구가 사성제의 가르침을 듣고 비로소 깨달음의 눈이 열린 초전법륜의 장면을 연상하면서, 이것을 ‘성문을 위한 가르침’이라고 보았다. 성문(聲聞)이란, 글자 그대로 소리를 들어서 깨치는 사람들이다. 그 이전에 어떤 스승도 설해주지 않았던 사성제의 가르침을 직접 듣고서 바야흐로 위없는 지혜를 얻게 된 것이다. 지의는 《법화현의》와 같은 만년의 설법에 이르러서는 사성제를 더욱 다양하게 설하였다. 즉, 성문·연각·보살·부처가 각각 서로 달리 이해하는 사성제인 ‘네 가지 사제[四種四諦]’로 설해보였다.
‘네 가지 진리[四諦]’란, 괴로움이라는 진리[苦諦]·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진리[集諦]·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滅諦]·괴로움의 소멸로 이르는 길이라는 진리[道諦]이다.

괴로움이라는 진리[苦諦]

‘괴로움’이란, 걸림 있는[有爲] 마음으로 짓는 모든 행위가 늘 근심 걱정으로 이르게 됨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괴로움은 네 가지[四苦]·여덟 가지[八苦] 등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지의는 세 가지 괴로움[三苦]을 들어 말한다.

첫째는 고통의 괴로움[苦苦], 둘째는 무너짐의 괴로움[壞苦], 셋째는 변화의 괴로움[行苦]이다. 이 세 가지를 따로 밝히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밝히기도 한다.

우선 세 가지 괴로움이 각각 세 가지 느낌[三受]을 상대한 것으로 본다. 괴로운 느낌[苦受]은 곧 고통의 괴로움[苦苦]이다. 즐거운 느낌[樂受]은 그 즐거움이 없어질 때 괴로움이 생겨나니 곧 무너짐의 괴로움[壞苦]이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은 늘 덧없이 움직이고 변하므로 곧 변화의 괴로움[行苦]이다.
혹은 세 가지 느낌에 모두 세 가지 괴로움이 있기도 하다. 즉, 세 가지 느낌이 모두 괴로운 인연을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모두 ‘고통의 괴로움’이다. 세 가지 느낌은 모두가 무너지는 모습이 있으므로 모두 ‘무너짐의 괴로움’이며, 또한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고 움직여 머물러있지 않으므로 모두 ‘변화의 괴로움’이다.

따라서 괴롭거나 즐거운 등의 느낌이 다 ‘괴로움’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일체의 현상이 곧 괴로움임을 알면 그것을 통하여 참된 이치를 깨닫게 되므로 ‘진리[諦]’라고 말한다.

번뇌의 원인 밝힌 진리[集諦]

집(集)은 불러 모은다는 뜻이다. 괴로움을 불러 모으므로, 괴로움의 원인[集]이라 한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번뇌에 두 가지가 있으니 이것이 일체 번뇌를 거둔다. 하나는 애착에 속하는 번뇌[愛煩惱]이며, 또 하나는 견해에 속하는 번뇌[見煩惱]이다. 이 두 번뇌에서 탐·진·치의 삼독과 다섯 가지 덮개, 10번뇌, 98번뇌 등이 모두 일어난다.

또, 괴로움의 원인으로 세 가지 업이 있다. 이 세 가지에 일체의 업이 거두어진다. 첫째는 불선업(不善業)이니 곧 열 가지 착하지 않은 법[十不善]이다. 둘째는 선업이니 곧 열 가지 착한 법이다. 셋째는 부동업(不動業: 不善不惡業)이니 곧 열두 가지 선정[十二門禪: 사선, 사무량심, 사무색정]이다. 만약 이 세 가지 업과 앞의 번뇌가 합하여 결국 삼계(三界)의 나고 죽는 괴로운 결과를 낸다.

중요한 것은 괴로움의 원인이 반드시 나쁜 행위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착한 행위와 심지어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갖가지 선법까지도 그것에 집착하거나[愛煩惱] 그릇된 견해[見煩惱]에 얽매일 경우에는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번뇌를 소멸하는 진리[滅諦]

멸(滅)은 사라져 없어진다는 뜻이다. 업에 얽매임이 다하면 생사의 근심과 번뇌의 불길이 사라진다. 그것을 열반(涅槃, nirvana)이라 한다. 열반에 두 가지가 있다. 삼계의 업과 번뇌가 사라지면 ‘남음이 있는 열반[有餘涅槃]’이며, 과보로 받은 이 몸[報身]을 버릴 때 뒷세상의 괴로운 결과가 영원히 계속되지 않으면 곧 ‘남음 없는 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는 참된 멸도’라고 말한다. 사라짐[滅]의 이치가 허망하지 않으므로 ‘진리[諦]’라 한다.

지혜에 이르는 길이라는 진리[道諦]

도(道)는 ‘능히 통한다’는 뜻이다. 정도(正道)와 조도(助道)의 이 두 가지가 서로 도와 능히 열반으로 통하여 이르게 하므로 ‘도’라고 이름한다. 정도(正道)라는 것은 37도품과 3해탈문 등을 실제로 관찰하여 이치를 반연하는 지혜의 행[緣理慧行]이며, 조도(助道)는 앞에서 설한 관법 가운데 갖가지 모든 대치법과 선정들을 말한다. 즉, 번뇌를 직접적으로 타파하는 지혜와 그 지혜를 얻기 위하여 행하는 온갖 선정을 통틀어 ‘도제’라고 한다.

  오지연
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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