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욕에 눈 멀어 술장사 하다 살인

천태종 제2회 신행수기 공모 대상작 -  절망의 늪에서 만난 부처님 / 김용건

단란한 가정 돈 욕심에 파국
수감 중 이혼하고 자살 생각도
모든 것 잃고 절망의 늪서 헤매

모든 전과자들의 집결지이며 사회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천대받는 밑바닥 인생들의 마지막 종착지로 불리는 이곳 교도소. 눈물과 마른 한숨으로 불면의 밤을 보낸 지 어느덧 8년이란 세월이 소리 없이 흘러가버렸다.
그 세월 동안 찌는 듯한 불볕더위와 세차게 몰아치는 한겨울의 매서운 한파는 참으로 견디기가 어려웠다.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대고 마룻바닥에 앉아서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추위를 조금이나마 덜어 보려고 엷은 수의의 깃을 단단히 치켜세우면서 지난날의 잘못된 삶을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피고인 징역 15년, 땅! 땅! 땅!”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이렇게 생전 처음 죄를 짓고 말로만 듣던 교도소 생활은 시작되었다. 길고도 험한 형벌의 시간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 지 두려움과 좌절감만 가득하였다.
더군다나 살인범, 강간범, 강력범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온 몸에 혐오스러운 문신과 칼자국으로 얼룩진 그들 곁에서 살아가는 것이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련 축에도 끼지 못했다.
정작 견디기 어려운 시련은 수감 후 4년이 지나서 찾아왔다. 그때까지 어려움 속에서도 잘 버텨주었던 아내가 돌연 이혼 얘기를 꺼냈다.
얼러도 보고 달래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군다나 징역 15년이라는 무거운 형을 받은 나로서는 더는 무어라 할 염치조차 없었다.
나는 결국 아내를 떠나보내야 했다. 그것은 내 목숨이요, 인생이기도 한 딸과 아들까지 동시에 보내는 것을 의미했다. 차마 매달릴 수도 없는 내 자신이 얼마나 비참했던지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 쳐지는 일이었다.
자유를 잃고 갇힌 삶을 사는 것은 그나마 참을 수가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가는 아내와 두 아이를 향한 그리움에 괴로운 삶의 끈마저 놓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또 다시 자포자기의 시간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삼광사 스님 법문 듣고 감동
“세상에 진 빚 하나라도 갚자” 다짐
관음주송으로 잃었던 ‘나’ 되찾아

이렇게 자신을 원망하고 한탄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모자라 동료들과 잦은 말다툼과 싸움을 하는 것이 내 모습이었다. 이러한 생활이 안타까웠는지 나를 지켜보던 담당 교도관께서 신앙생활을 권유하셨다.
그로 인해 매주 수요일 불교법회에 다니게 되었다. 처음엔 그냥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떡이나 빵 같은 공양물을 받아 올 욕심에 법회에 다녔을 뿐, 부처님의 가르침에 진실로 다가 설 계기를 갖지는 못했다.
그런데 내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불현듯 눈을 뜨게 된 것은 당시 부산에 있는 (삼광사)스님을 만나면서다. 스님은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하시면서 “지금의 어려운 현실을 잘 극복한다면 훗날 새로운 삶을 사는데 있어서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또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을 일념으로 염송하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눈과 손으로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는 관세음보살님께서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 주신다기에, 그때부터 관세음보살을 지극히 염송하는 것이 일상생활이 됐다. 그 후 담당 교도관의 도움으로 불교방(거실)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다. 3평 정도의 좁은 공간에 모셔져 있는 관세음보살님과 함께하고 있으니 예전에는 가져보지 못했던 마음의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나날이 조금씩 변해가는 내 모습에서 무엇이든지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여유도 발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차피 살아있을 것이라면 세상에 진 빚 중 어느 하나라도 갚고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자비로운 부처님 품속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새로운 지혜의 눈을 뜨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었다.
조석으로 부처님께 올리는 예불을 통해 마음에 끼어있는 삼독심의 때를 벗기면서 마음의 빛을 보게 됐고, 참 자유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했다. 또 매일 아침 108배를 통해 하심(下心)을 배우고 내 손으로 직접 목탁을 두드리며 예불을 올리는 순간만큼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아집과 번뇌가 다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아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부처님 법을 만나고 나서 이제는 모든 면에서 안정을 찾았고, 이곳의 수감생활도 곧 수양생활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선택을 했지만, 불교를 만난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선택이요, 기쁨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등한시하는 이곳 교도소를 아무런 선입견도 갖지 않고 찾아주셔서 용기와 희망을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스님들을 만나게 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다. 
나는 교정시설에서 시행하는 자격시험에 응시해 좋은 결과도 얻었다.
워드 3급, 2급, 1급, 양재 2급, 패션디자인산업기사 1급, 한문검정 4급, 컴퓨터그래픽자격증을 취득했다. 독후감발표 우수상, ‘칭찬합시다’ 수상 등의 영예도 누렸다. 현재는 컴퓨터정보처리기능사 시험에 대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좋은 결과가 주어진 것은, 불교를 접해 지금까지 수행의 방편으로 해 온 108 배와 관세음보살을 지극히 염송한 것에 대한 부처님의 가피가 아닐까 싶다.(나무관세음보살)
지금도 가끔씩 생각난다. 수년 전 법회에 참석해 스님의 법문을 듣지 못했더라면 과연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사실 영어의 몸이 된 지 올해로 9년 째 접어들고 있지만 이렇게 신행수기를 쓰기까지 상당한 고민을 했다.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 나 자신에게 수없이 반문해 봤다. 하지만 나와 똑같이 자신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지난 세월 동안 어둠과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며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에 용기를 내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나는 어디 나가서도 밀리지 않을 만큼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산을 좋아한 덕분에 산행을 갔던 덕유산에서 예전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고, 딸과 아들을 낳아 단란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행복에 어두운 그림자를 끌어들인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나 자신이었다. 행복에 겨워 눈이 멀었던 것일까?
나는 때 아닌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어엿한 직장에 다니고 있었으면서도 친구가 유흥주점을 하는 게 무슨 떼돈을 버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끌렸다. 결국 그것이 파국의 빌미가 돼 나는 어두운 음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고, 끝내는 업소 운영과 관련된 시비 끝에 결코 씻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살생의 죄를 지어 영어의 몸이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다.
사랑하는 아내도, 분신과도 같았던 아이들도, 가까운 친지도, 친구들도 모두 잃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나’를 잃었다.
이렇게 나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절망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부처님을 만나 잃었던 ‘나’를 되찾게 되었고, 작은 깨달음도 얻게 되었다.
맹구우목(盲龜遇木)의 인연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모든 것이 연기(緣起)의 원리에 의해 이뤄지는 것임을,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마음의 먼지는 집착에 의해 쌓이게 되는 것임을,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가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늘진 공간에서 희망보다 절망적인 삶을 가지고 살아가는 많은 분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신앙의 힘이 얼마나 큰지도 이 글을 통해서 전해드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이 수기는 지난날 추악했던 마음이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질 수 있는 진솔함이 담겨 있는 글이기에, 저로 인해 고통 받고 마음 아파하는 모든 인연들에게 바치고 싶다.
조용히 두 손 모아 절망의 늪에서 만난 부처님께 감사드린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