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  불교 8대 성지 참배

뜨거운 열사의 땅을 가르며 타는 목마름을 식혀주고, 죽음의 두려움마저 씻어주고 안락의 기쁨을 주는 성수인 갠지스강! 15일 아침 일찍 찾아간 갠지스강 주변은 일출을 보기 위해 모인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인도인들은 죽으면 바라나시에서 화장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부모에게 드리는 최고의 선물은 부모를 위해 갠지스강 주변에 방을 얻어주고 그곳에서 살다가 돌아가시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강이 모든 것을 씻어 낼 수 있는 불가사의한 위신력을 갖춘 성수(聖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강가에서 몸을 씻고 합장 축원하며 소원을 빌고, 죽을 때가 되어서는 성수에 몸을 씻고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화장을 하고 그 밑에서는 사람들이 목욕을 하면서 그 물을 마시고 있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그렇지만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도인의 聖水 ‘갠지스강’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니 모래사장이 나왔다. 그곳을 석가모니 부처님이 지나가셨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래를 담아가려고 했다. 인도에 온 기념으로 무언가 가지고 가고 싶어서이겠지만, 서원을 세우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을 제도한 그 분의 사라지지 않는 발자취를 잠시라도 생각하는 것이 훨씬 값진 일이 아닐까.
그리고 부처님과 같이 우리도 서원을 세워 수행을 열심히 해서 중생제도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일이 모래 한 줌을 담아 가는 것보다 훨씬 더 불자다운 모습이다.

최초 설법지 사르나트

갠지스강을 보고 난 다음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최초로 5비구를 위해 법륜을 굴리신 사르나트로 갔다. 지금은 커다란 스투파가 있고, 인근에는 큰 스투파가 있던 자리가 있었다. 이곳에서 부처님은 비구들을 위해 사성제를 설했는데, 45년 간 설법의 시작점이었다. 말하자면 《아함경》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모셔졌던 커다란 스투파가 있던 자리에 앉아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생각해 보았다. 연화좌를 하고 앉은 그 자리가 너무 편하게 느껴졌다.

근처의 박물관에 가보았는데, 그곳에는 많은 불상들이 모셔져 있었다. 특히 인도에서 가장 아름답게 조성되었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상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감은 눈에 밝은 미소가 흐르는 살찐 얼굴로 연화좌를 하고 앉아 계시는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16일 아침 일찍 일어나 부처님이 수행을 하면서 마구니의 항복을 받아 대각을 성취한 대보리사로 갔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많은 순례객들이 모여들었다. 순례단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법회를 보았다.

대보리사에는 부처님 당시의 보리수는 아니지만 커다란 보리수가 있었다. 당시 보리수 아래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대보리사 주변에는 많은 수행자들이 선정에 든 모습이 보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행처럼 깊은 선정에 젖은 모습들이 너무 보기가 좋았다.

◇ 기원전 520년경 아쇼카왕이 세운 높이 52m의 대보리사 전경.
아침 공양을 한 후에 라즈기르의 영취산으로 향했다. 이곳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신 곳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과거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실 당시 이곳에는 많은 청중들이 모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사람크기 만한 나무들이 모여 있을 뿐이었다.

영취산 정상 근처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이 머물던 동굴들이 있었다.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 있는 정도의 작은 곳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바로 이 산에 머물고 계셨다. 아마 부처님께서도 크지 않은 작은 공간에 계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취산 정상에 올랐다. 그곳에는 독수리 머리 모양의 바윗돌이 있었다. 독수리가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 바윗돌을 지나가니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앉아서 설법을 하신 곳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순례단은 법회를 보았다.

 
영취산에 남은 부처님 숨결

중국 천태종을 개립한 천태 지자대사는 그의 스승 혜사 스님과 함께 이곳 영취산에서 《법화경》 설법을 들었다고 한다. 이 인연으로 천태대사는 법화삼매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법화경》을 중심으로 불교학의 체계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대한불교 천태종은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영취산은 천태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7일 바이샬리로 갔다. 이곳은 《유마경》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유마경》은 천태종에서도 중요시 여기는 경전이다. 천태대사는 만년에 《유마경》에 대해 쓴 글에서 ‘일품ㆍ일게ㆍ일구 모두가 불이법문에 들어 부사의해탈에 머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순례단은 《유마경》을 설한 장소를 방문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대림정사로 향했다.

대림정사는 당시 이곳에 지독한 가뭄이 들어서 굶주림과 병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문을 외워 하늘에서 비가 내리자 서서히 굶주림과 병이 사라졌고, 이를 고맙게 여긴 왕이 부처님이 오래 머무실 수 있도록 지은 사찰이다.
대림정사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던 자리가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대림정사의 크기는 10Km가 넘을 정도로 큰 대사찰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몇 미터도 안 되는 조그마한 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대림정사를 잠깐 보고 나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라로 출발하였다.

오후 4시가 다 되어서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가 있던 곳에 도착했다. 사라쌍수 사이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다고 전한다. 지금은 당시의 사라쌍수는 아닐지라도 쌍수가 있으며, 또 우협으로 누워계신 석가모니 부처님상을 모신 사원이 있었다. 그곳에서 순례자들은 간단히 법회를 보았다.

 

◇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도 후 다섯 비구에게 처음 설법한 장소인 사르나트(녹야원)에 세워진 영불탑 앞에서 법회를 보고 있는 천태종 성지순례단.

‘곽시쌍부’ 일화 담긴 쿠시나가라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곳에서 《열반경》을 설하셨다. 《열반경》에는 부처님이 쿠시나국의 장사들이 태어난 곳 아리라발제 강가의 사라쌍수에 계셨다고 한다. 춘다가 바치는 마지막 공양을 받으시고 보시의 과보를 설명하셨으며, 법신ㆍ반야ㆍ해탈의 삼덕과 불성에 대해 설하셨다. 사라쌍수가 있던 곳을 나와 버스를 타고 얼마 안가니 부처님의 다비장소가 있었다.
부처님의 열반을 지켜보지 못한 제자 가섭이 도착해 부처님을 일심으로 경모하고 찬탄하니 부처님께서 불족을 관외로 보이신 곽시쌍부(槨示雙趺)의 일화가 있는 곳이다.

18일 오전 샹카샤에 도착하였다. 《마하마야경》 또는 《불승도리천위모설법경》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리천에 계시는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낳아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삼독을 끊는 법과 주문 등을 설하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이 제석천과 범천 등과 더불어 하강하는 곳이 바로 상카샤다. 이와 같이 샹카샤는 부처님의 효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기원정사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고도 한다. 기타태자(祇陀太子)의 수림(樹林)과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 또는 수달장자(須達長者)의 정원이라는 의미다. 기타태자는 수달장자에게 이곳의 땅을 사기 위해서는 금으로 덮으라고 하였으며, 실제로 수달장자는 창고에 있는 금을 꺼내어 땅을 금으로 덮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이 땅을 얻어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곳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곳에 오래 머무셨으며 24번의 하안거를 하셨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해 탁발로 생활하셨다. 모든 세속의 번뇌를 털어버리고 무소유의 삶을 보여주셨다.
이곳 기원정사는 이러한 그의 삶이 있던 곳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찾아보고자 삭발을 했던 장소, 석가모니 부처님이 머무신 장소, 설법하신 장소 등 열심히 돌아다니며 자세히 보았다.

마음으로 느낀 부처님
탁발을 하시고 돌아와 공양을 하시고 옷과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자리가 있던 곳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자꾸 돌아볼수록 왠지 모를 허전함이 엄습해 왔다. 벽돌로 된 기원정사의 터를 보면서, 이 자리가 비록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석한 자리라고 하더라도 그 모습이 온전히 있을 수 없으며, 세상은 무상하여 변하기 마련인데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았다.

기원정사를 나와 부처님의 탄생지인 네팔로 향했다. 18시경 인도국경을 넘어 네팔로 들어갔다. 19일 아침 일찍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 동산으로 갔다. 순례자들은 간단히 법회를 보고 나서 주변을 거닐며 위대한 성인의 탄생지를 말없이 둘러보았다.

인도와 네팔의 순례를 마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고 성도한 뒤 초전법륜을 굴린 이후로 많은 교화행을 하고 나서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들 때까지의 여정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마치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고 길에서 열반에 드신 것처럼 길과 가깝게 지내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이용해 석가모니 부처님의 발자취를 찾아 길을 다녔지만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지평선 너머의 머나먼 길을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걷고 또 걸으셨던 그 분의 모습이 보였다. 순례단이 룸비니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침 해가 떠서 길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광도 스님/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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