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불교문화 아니다”
미등 스님 (조계종 총무원 기획국장)

점은 인간의 불안심리를 반영한 사회 현상이다. 인류와 함께 해 왔을 때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전 세계적ㆍ보편적 문화다.

다만 서양은 유목 중심의 문화가 지배해 이동생활을 하다 보니, 변하지 않는 별자리로써 길흉화복을 예측했다. 반면, 동양은 농경 중심의 문화로 정착생활을 하다 보니, 변화하는 자연현상을 점쳤고, 점은 세분화 됐다. 동양에서 우주를 대우주, 인간을 소우주로 본 것이 그  예다.

우리나라는 불교가 삼국 시대와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도교문화와 유교, 한자 문화를 접하며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사서삼경의 핵심경전인 역경(주역)도 불교문화와 융합됐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점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냉정하게 말해 불교문화가 아니다. 부처님은 연기적 법칙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연결돼 있으므로,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허망하게 기대하지 말며 오늘 현재에 충실하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노력을 하면 내일이 밝은 것은 당연하다. 점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을 포교의 수단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주목적이 호구지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답답해서 점을 보고 싶거든, 부처님 가르침대로 연기의 원리를 깨닫도록 노력해라. 그게 어려우면 수행과 기도 등을 행하라. 한 곳에 집착하면 폭넓게 생각하지 못한다. 과거ㆍ현재 미래의 연장선상에서 시간과 공간의 인과와 인연의 조화 속 현상을 관찰하고, 고통과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이를 차근차근 해결해라. 힘들다면 그 이유를 찾아야지, 맹목적으로  점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점 관심 불자 신앙 회귀시켜야
법현 스님 (태고종 열린선원장)

개인적으로 점을 배제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부처님은 점뿐 아니라 별자리 관찰, 의술 등을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근기가 낮은 중생들은 높은 차원의 가르침이 어려워 점에 관심을 갖기 쉽다. 그런데 한번 관심을 가지면 불교의 본질로 돌아오기가 어렵다. 경험상 본질상 돌아온 사람이 적기에 부처님 가르침대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다. 헌데 점을 뵈주는 사람 중에는 그렇지 못한 이들이 많다. 특히 무속으로 점을 보는 경우는 위험하다.

그 부분에 대한 위험성을 직시하신 부처님은 번뇌가 사라지면 니르바나가 온다는 것을 알고, 여덟 가지 바른 길을 실천해야 한다고 설하셨다. 불자들은 이러한 내용을 모른 채 일정 내용만  듣고 자신의 인생을 내맡겨서는 안 된다.

관련 역술 강의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강의는 우리 인류가, 대한민국이 갖고 있는 문화에 대해 긍정ㆍ부정 입장을 떠나 존재로서 이해해야 한다.

교단 차원에서는 성직자나 신도들을 불교의 본질로 돌아오도록 하는 관심과 프로그램과 교육을 마련해야지, 비난하고 방치해서는 안 된다.

교단 차원에서 이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면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종단에 의한 폐해가 극심한 가운데 기본도 모르는 이들이 많다. 일부 교단에서는 승속을 막론하고 자기 종단의 소의경전과 자기 절에 모셔진 주불과 좌우보처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이를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범불교적 노력으로 바로 갈 수 있도록 지도에 힘을 모아야 한다.


“포교 방편 활용…신비성 맹신 말아야”
신 성 수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부처님은 ‘현대식 상담학의 대가’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은 자연과 인생의 본질을 꿰뚫고 계셨기에 가르침을 모든 중생의 근기에 맞게 헤아려 설해 어떤 중생에게도 위기감을 조성하지 않고, 슬기롭게 깨우침을 이끌었다.
현대 사회는 2,500여 년 전 당시와 문화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법문 위주의 포교 방식에서 벗어나  현대식 포교방법의 도입이 필요하다.

중생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방편으로써 상담과 ‘예측 판단’하는 역술을 활용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점은 현상세계에서의  현실적 판단 방편이 된다.
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무속의 영역인 신점은 정신계 영역이나, 매도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매개자가 무속인이고, 정상적 이성상태에서 점을 보는 것이 아니므로, 특수성과 한계성을 지닌다.
이외의 일반적인 점은 현재 판단과 미래 예측을 하는 수단으로 그 종류에는 사주팔자, 명리, 풍수, 자미두수, 육임 등이 있다. 여기에서 무속은 제외한다.

점의 결과는 상황판단 방법이지, 결정적 인과성을 가진 피할 수 없는 길은 아니다.
점괘 결과를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환상과 신비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초능력과 신통력, 육신통, 천안통을 내세우는 것은 ‘사짜(삿된 이)’다.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다. 무엇이든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불가항력으로 안 좋은 일이 올 수 밖에 없다면, 안 좋은 일은 피하게 만드는 것이 상담자의 몫이다.
성직자가 개인적 영리나 신도들을 얽매는 수단으로 쓰는 것은 방편 차원을 벗어난 것이다. 앞날에 대해 단정적으로 확정짓는 것도 잘못이다. 상담자는 좋은 쪽으로  이끌어야 한다.

 

“한국불교는 유·도교 복합 문화”
박 상 만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진표율사(眞表律師)는 김제 금산사에 골간자(骨簡子)를 통해 절터를 정했다고 한다. 한국불교에서는 나무로 만든 솔개를 날리거나 연을 날리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절터를 잡았다. 이는 용신신앙, 수신신앙을 믿었던 중생들을 교화시키기 위한 방편반야로 사용되기도 했다.

불교계에서 좋은 절 자리를 잡는 것은 행위를 결정하는 점치는 행위나 같은 맥락이다. 절에서 간혹 점을 치기 위해 책력을 보는 스님도 있다. 탄허 스님은 《주역선해》 강론을 통해 불교에서 주역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했느냐에 의미를 뒀다.

그럼에도 현대 한국불교계는 점을 표면적으로 금기시한다. 우리 불교는 유교와 도교, 동양철학이 함께 복합된 문화를 이루고 있는 만큼 순수 인도의 근본불교가 아니다. 한국불교는 중국을 거쳐 들어와 대승불교와 전통신앙 등이 함께 융합돼 있다.

또 현대인에게 언제까지 옛날식으로 주장자를 들고 할(喝)을 하며 설법을 해야 하는가. 반야 지혜는 중생과 함께 하는 지혜다. 점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그것과 부처님 가르침과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불교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자기를 금방 찾기는 어렵다. 따라서 듣는 사람의 근기(根機)에 맞춰 설법[對機說法]해야 한다. 점은 그 한 방편이다. 점은 남을 알기 위해 하는 공부가 아니라 자기를 알기 위한 공부다. 점은 불행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방향을 제시하고,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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