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불광산사를 개산한 성운 스님이 2월 5일 입적했다. 
대만 불광산사를 개산한 성운 스님이 2월 5일 입적했다. 

대만 불교의 현대화 상징이자 세계적인 불교 지도자로 추앙받았던 성운 대사가 입적했다. ‘인간불교’의 서원을 바탕으로 대만 불광산사(佛光山寺)를 개산한 성운 스님은 대중들에게 마지막까지 ‘청빈(淸貧)’과 ‘포교’를 강조했다.

성운 스님은 1927년 중국 장쑤성(江蘇省) 강도(江都)에서 태어났다. 9살이 되던 해 강에 빠져 죽음의 위기에 처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어머니에게 “평생 사람을 구하고, 자신도 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어느 스님의 설법을 듣고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좋은 가르침을 널리 알리겠다.’고 발심했다. 12세인 1938년 난징(南京) 치샤산 대각사에서 지개(志開)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법명은 오철(悟徹), 법호는 금각(今覺), 필명은 마가(摩伽)다.

출가 후 성운 스님은 서하율학원·초산불산불학원(焦山佛山佛學院)에서 수학했다. 이후 백탑초등학교장·〈노도월간 (怒濤月刊)〉 주간·난징 화장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그는 당시 중국의 불교계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삶의 지침이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산 속에서 불공과 재만 올리는 현실에 실망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때부터 현실적인 불법홍포에 대해 궁구하기 시작했다.

성운 스님은 1949년 장제스(蔣介石, 1887~1975)와 함께 대만으로 건너왔다. 이후 중리(中壢)의 원광사에 머무르며 포교활동을 펼쳤다. 1952년 뇌음사에서 불법 홍포를 위해 염불회·홍법단 등을 조직했으며, 1957년에는 불교서적과 음반을 출간하며 포교사업의 기초를 닦았다.

성운 스님은 1967년 대만 가오슝(高雄)에 ‘불광산사(佛光山寺)’를 창건, ‘인간불교와 인간정토 건설’을 발원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문화를 통한 불법홍포 △자선을 통한 사회기여 △수행을 통한 인간마음 정화 등 4대 종지를 발표했다.

“부처님은 인간세상에서 태어나 수행하고, 정각을 이뤘으며 중생을 교화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가르침은 사람을 대상으로 펼쳤으므로 ‘인간불교’야 말로 부처님 본연의 가르침이다. 인간불교는 삶의 현장에서 불법(佛法)을 실현하는 것으로, 우리의 일상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조명하고, 그 가르침에 입각해 삶의 본질을 완성하는 것이다.”

성운 스님은 또 “발심과 성불에는 남녀, 출·재가의 구분이 없다.”면서 비구·비구니의 평등, 출·재가자의 평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뜻을 바탕으로 1991년 신도대중 교단인 국제불광회를 설립했다. 불법홍포의 역할을 승가대중에서 신도대중으로 확장, 전개하려는 목적이었다.

이와 함께 시민교육과 문화활동을 바탕으로 한 포교활동을 펼쳤다. 수산불교학원·중국불교연구소·불교문물진열관·불광정사(양로원)·대자육유원(고아원)·불광출판사·불교진료소 등 다양한 포교·복지기구, 교육기관 등을 설립해 교육·문화·자선·구제 사업에 일평생 진력했다.

현재 대만 불광산사는 세계 각지에 200개가 넘는 분원을 설치했으며, 100여 개의 국제불광협회 지부와 하위 지부, 5개 종합 대학 등을 설립, 운영 중이다. 아울러 미국 LA 부근에 서래사와 웨스트 대학 등을 건립했으며, 미국 전역에 30여개 사찰을 세웠다. 호주에 대학을 설립하는 등 세계 각지에 300여 개의 사찰과 교육기관을 세워 글로벌 포교에도 앞장서 왔다. 

성운 스님은 201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큰 수술을 받았다. 이후 회복돼 〈나는'자까오' 화상이 아니다〉 등 다수의 서적을 출간했으나, 최근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 성운 스님은 2월 5일 주요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법랍 85년, 세수 97세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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