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은 부처님오신날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 날입니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은 인도 땅의 카필라성 성주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였습니다.

부처님은 태어날 때 아주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마야부인이 꾼 태몽조차도 특별했습니다. 흰 빛깔의 훌륭한 코끼리 한 마리가 은빛 찬란한 코로 흰 연꽃 한 송이를 들고 한소리 우렁차게 외치면서 황금궁전에 들어와 마야왕비가 누운 침대를 오른쪽으로 세 번 돈 다음에 왕비의 오른쪽 갈비를 헤치고 태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코끼리와 연꽃이 불교의 상징이 되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도는 모습들은 모두 공경의 표시로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는 불교적 예법이 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나 스승들께 삼배를 올리는 것도 그런 전승일 것입니다.

마야부인이 친정인 코올리성으로 돌아가던 도중 온갖 꽃이 만발한 룸비니 동산에서 무우수(無憂樹) 나뭇가지를 붙잡은 자세로 아기를 순산했다는 이야기도 다분히 상징성을 보입니다. 온갖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꿀벌과 새들이 자유롭게 나는 대자연 가운데서 아무 걸림도 없이 부처님이 탄생하였다는 것은 부처님 사상의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설명합니다. 근심과 고통이 없는 세계에 대한 지향을 분명히 하고 있으면서 아름다운 극락세계를 모든 사람을 위해 이미 준비하고 있다는 상징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아기는 어머니의 태안에 있었으나 더러운 물질에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고 밝고, 깨끗했으며 비단에 싸인 진주처럼 빛나는 몸으로 어머니 태를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끗함과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상징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가진 불성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었음을 상징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경전은 아기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동쪽으로 일곱 걸음을 딛고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크게 외쳤다고 합니다. 어린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걸었다는 것이나 큰 소리로 외쳤다는 것이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그 이야기의 상징성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부처님이 그만큼 훌륭한 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또 아시다 선인(仙人)은 선정 가운데서 삼십삼천의 신들이 천의를 흔들면서 부처님의 탄생을 찬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신들로부터 “비할 바 없이 훌륭한 이승의 보살이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이승에 태어난 것을 축하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부처님의 탄생은 결국 이승의 모든 인류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기 위해서라는 점이 분명히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아시다 선인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인은 이미 나이가 들어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이의 설법을 들을 수 없을 것을 생각하고 이를 안타까워 한 것입니다.

이런 부처님 탄생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오신날을 마음과 정성을 다해 봉축해야 합니다. 우리 모든 중생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오신 부처님에 대해 우리가 마음과 정성을 바쳐 경축하고 기뻐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시다 선인은 접하지 못해 눈물을 흘렸지만 우리는 경전을 통해서나 스님들의 설법을 통해 부처님의 최고의 깨달음에 대해 언제라도 접하고 살고 있는 것에 대한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부처님은 온갖 번뇌와 고통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는 사바세계의 우리들이 모두 본래부터 부처님의 성품을 갖추고 있는 축복받은 존재라는 점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오신날을 경축하기 위해 연등을 밝힙니다. 부처님 오심을 축하하는 불 밝힘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무명과 어리석음을 부처님의 지혜와 깨달음의 힘으로 청산한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면서 무지와 무명을 연등으로 밝혀야 합니다.

조선시대에 우리 선인들은 음력 4월 초파일이면 집에서 만든 가지가지 연등을 밝혀 식구 수만큼 장대에 매달아 높이 올리려고 애썼습니다. 등에는 꿩의 깃을 달고 울긋불긋한 헝겊도 매달았습니다.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해서만이 아니라 잡귀와 악귀를 물리치려는 기원이 담겨있고 남보다 더 큰 복덕과 길상을 기대하는 풍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풍속도 거의 시들어서 집에서 연등을 만드는 일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절에서 만든 연등이 불자들의 이름을 달고 절 마당을 가득 채우는 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다종교 사회가 되다 보니 부처님오신날의 풍속도 크게 위축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좋은 풍속은 지금이라도 되살리고 키우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