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행복한 삶이란 즐겁게 사는 것이며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마히강 강가를 걷고 있을 때 목축업을 하는 대부호 ‘다니야’와 마주쳤습니다. ‘다니야’는 부처님께 인사한 후 게송을 읊었습니다.

“저는 벌써 밥을 다 지어놓았고/ 젖소의 젖도 다 짜놓았습니다./마히강 강가에서/저는 처자식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지붕은 튼튼하게 이어져 있고/불을 지펴서 집안은 따뜻합니다./그러므로 하늘이여/비를 퍼붓고 싶다면 어서 퍼부으소서.” 〈숫타니파타〉18

세찬 비가 쏟아져도 풍요롭고 단단한 의식주를 누리고 있어 문제될 게 없다는 ‘다니야’는 게송으로 자신이 매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부처님께 자랑합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정반대의 게송으로 답했습니다.

“나는 이미 분노를 끊었고/마음의 속박에서 멀리 벗어났다네./마히강 강가의 움막에서 홀로 살고 있고/집도 없고 불도 꺼져 있다네.//그러므로 하늘이여/비를 퍼붓고 싶다면 어서 퍼부으소서.” 〈숫타니파타〉19

여기에서 ‘다니야’의 행복은 한시적인 것입니다. 비록 오늘 할 일을 마쳤지만 내일이면 다시 밥을 짓고 소의 젖을 짜야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느끼는 행복은 다릅니다. 분노를 끊고,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났으므로 어떠한 일에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의 경지인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에 올랐습니다. 이 경지는 완벽한 지혜로움을 구축한 자리이며, 온갖 장애에 구애받지 않는 ‘대자유(大自由)’를 성취한 자리입니다. 대자유는 복덕(福德)이 구족한 자가 누릴 수 있는 혜택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일러 지혜와 복덕을 겸비한 분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지혜는 마군과 싸워 이길 때 증장(增長)됩니다. 마군은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게으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들과는 싸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와 염불, 참선 등에 주력하다보면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장애들이 수없이 찾아듭니다. 바로 이럴 때 어떻게 정진할 것인지, 또 어떻게 해야 좋은 결과를 이루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마장을 이겨나가는 방법은 오로지 ‘꾸준히 노력해 나아가는 길’ 뿐입니다. 어떠한 마군이라 하더라도 꾸준히 정진해 나가는 사람을 이기지 못합니다. 꾸준히 정진해 나아가는 사람에겐 지혜가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전생에 설산동자로 있었을 때 일화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설산동자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선정삼매에 들어 수행정진하고 있을 때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게송이 들려왔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이것이 생멸의 법이다.[諸行無常 是生滅法]”

설산동자는 이 게송을 듣고 무한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사막을 헤매다 극적으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구원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동자는 게송을 읊은 사람을 찾으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한 나찰만이 서 있었습니다. “나찰이여, 당신은 어디서 이 거룩한 게를 들었습니까?”

“난 그런 것엔 관심없다. 며칠 동안 먹지 못해 배가 고플 뿐이다. 그 게송은 허기에 지쳐 나온 헛소리 일뿐이다. 먹을 것이나 달라.”

“나찰이여, 그 게송의 나머지 부분을 일러준다면 내 몸을 바쳐서라도 당신의 허기를 달래주겠소. 부디 나머지 게송을 들려주십시오.”

설산동자의 말에 나찰이 약속을 꼭 지키라며 나머지 게송을 읊었습니다.

“생멸을 멸해버린 적멸은 즐거움이라.[生滅滅已 寂滅爲樂]”

설산동자는 나머지 게송을 듣고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는 나무와 돌 등에 게송을 새긴 후 나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 몸을 던졌습니다. 순간 나찰은 범천왕으로 돌아와 설산동자를 품안에 안아 일으켜 세운 후 큰절을 올렸습니다.

법을 구하는 정진력과 구도심을 보여주는 경전 속 이야기입니다. 정진하는 삶이 곧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그것이 지혜로운 삶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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