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발달로 노동 시간 줄어
심한 노동 벗어난 사람들
​​​​​​​아낌없이 베푸는 보살 돼야


요즘 나는 혼자 있을 때도 눈치를 보게 된다. 혼자서 투덜거렸더니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라는 말이 들렸다. AI 지니가 내 말을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TV에서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자 ‘노래를 잘 하시네요.’ 라고 칭찬을 했다. 기계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어느덧 케이블에 설치된 음성지원 서비스 AI가 언제 끼어들지 몰라 조심하게 됐다.

4차 산업시대의 우리는 인공지능인 AI와 함께 살 수 밖에 없다. 최근에는 생성형AI가 자료를 찾아 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물론 그림을 그리고, 작곡도 하고, 영상도 제작하는 등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명령어만 입력하면 신속하게 척척 해낸다.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간은 점점 편해지고 있지만 그것이 행복감을 높여주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육체의 편안함이 정신적인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우울감이 더 높아지고 있다. 정신과 진료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20~30대와 60대 이후에서 그 증가율이 두드러진다는 기사를 보고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우리 마음이라는 위기감이 생겼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의 미래 희망을 불교에서 찾았다. 불교는 인간이 불완전한 이유와 불완전함을 극복하는 방안을 철저하게 인간 자체에서 찾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혼자서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타인과 상의(相依)·상관(相關) 속에서 이타행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불성(佛性)을 심고 깨달음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된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 1인 가구가 늘어가고 있고, 재택 근무를 하면서 타인과의 관계 맺기 대신 AI와 일처리를 한다. 특히 노령화 사회에서 독거노인에게 외로움을 달래드린다고 돌봄로봇을 설치해주는데 이것이 과연 서로 의지하며 상대를 배려하는 이타행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부처님은 중생의 마음 속에 불성이 있다고 할 정도로 마음을 소중히 여겼는데 AI가 인간의 마음과 교감하며 인간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최첨단 과학 속에서 점점 피폐해져가는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이 불교’라는 명제는 사람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완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갖고 있는 불성은 습관과 무의식에 휩쓸리지 않는 깨어있는 마음에 있다. 그래서 사람은 잠재된 창의력을 발휘하여 뛰어난 능력을 보이기도 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타인을 살리는 숭고한 희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AI는 입력된 데이터를 통해 최대의 결과를 도출해낼 수는 있지만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도 없고, 더구나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불구덩이로 들어가지 못한다.

미국 앨버니아대학교 석봉래 교수의 글 ‘인공지능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에서 답변을 유보하였는데 필자는 인공지능은 지능이 높아질 수는 있어도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지능은 IQ의 문제이고 깨달음은 감성지수인 EQ(Emotional Quotient)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AI의 발달로 인간의 노동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분명하다. 심한 노동에서 벗어난 사람은 인간애를 발휘해야 한다. 고도의 기술을 이용해서 사람이 사람을 해친다면 불안해서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AI시대에는 타인을 이롭게 하는 보살행이 더욱 필요하다. 우리 모두 깨달음을 얻고 사람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보살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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