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선 수행 방편 삼은
베를린필 종신 지휘자

카라얀은 지휘할 때 눈을 뜨는 법이 없다. 마치 명상을 하듯 절제된 몸짓과 표정으로 지휘를 한다. 
카라얀은 지휘할 때 눈을 뜨는 법이 없다. 마치 명상을 하듯 절제된 몸짓과 표정으로 지휘를 한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은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음악에 몰입한 듯, 내면에 몰입한 듯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을 보고 있노라면 이제는 지나가 버린 아름다운 시절의 한 장면을 목격하는 듯하다. 현대는 오케스트라 단원과 지휘자 사이에 민주적 관계가 정립했지만, 카라얀은 활동 당시 제왕적 리더십과 시대를 앞선 감각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그렇게 얻은 화려한 타이틀이 ‘음악의 황제’·‘음악의 제우스’·‘지휘의 천재’ 등이다. 한때 베를린필만이 아니라 라스칼라 오페라하우스·런던 필하모닉·비엔나 국립오페라·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등을 동시에 이끌며 ‘유럽 음악 총감독(General Music Director Of Europe)’으로 불리기도 했다. 카라얀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유럽 클래식 음악을 대표하며 ‘그 역사를 새로이 쓴 인물’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 시절을 한 마디로 보여주는 카라얀의 일화가 있다.

택시를 잡아탄 카라얀에게 기사가 목적지를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이다.

“어디든 상관없어요. 두루 다 내가 필요하니까요.”

47세의 베를린필 종신 지휘자

카라얀이 베를린필 지휘를 처음 맡은 시기는 상임지휘자에 임명되기 18년 전인 1937년이다. 당시 29세였던 그는 “베를린필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교향악단임을 느꼈다.”고 말했다. 전임 지휘자 푸르트뱅글러(Furtwängler)의 사망 후 상임지휘자로 내정되었을 때 그는 이 오케스트라를 위해 모든 걸 내려놓을 테니 대신 종신직을 달라고 요청했고, 승인을 받았다. 그는 다른 선례처럼 중도에 해임되어 자신이 들인 공과 계획이 무산되는 걸 원치 않았다.

지휘자로서 카라얀의 대표적 기술은 오케스트라에서 극히 아름다운 소리를 추출하는 능력이다. 카라얀이 베를린필의 지휘봉을 잡은 지 30여 년이 지난 1986년의 어느 날, 그의 전기작가 로저 본(Roger Vaughan)이 말했다.

“관중의 주의를 사로잡는 것은 소리의 아름다움과 완벽함이다. 매우 약한 피아니시모(Pianissimo) 소리는 완전 몰입 상태를 요구한다. 부드러운 소리로 출발해 점점 세지는 크레센도(Crescendo)는 완벽한 지점에서 정점에 달한다. 음이 중단되는 곳은 조금의 껄끄러움도 없이 칼로 자른 듯 깨끗하다.”

일정한 규칙 없이 지침만 존재하는 그의 지휘는 결과만 좋다면 별난 접근법도 허용할 정도였다. 베를린필의 수석 플루트 연주자(1969~1975)로 활동했으며 ‘플루트의 전설’로 불렸던 제임스 골웨이(James Galway)는 이를 증명하듯 “카라얀은 원하는 대부분을 스스로의 매력을 통해 이뤄냈다.”고 말했다. 카라얀의 지휘에 대한 최고의 칭찬은 작곡가에게서 나왔다. 얀 시벨리우스(Jean Sibelius)는 “카라얀만이 내가 의도한 것을 연주하는 유일한 지휘자”라고 극찬했다.

오페라 지휘 후 구급차 실려가기도

오케스트라 지휘는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한다. 각 파트의 악기들이 내는 음을 체크하고, 각각의 음이 전체와 잘 어우러지는지 살펴야 하며, 이들이 한데 모여 지휘자 자신이 원하는 화음을 내는지도 신경을 써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교향곡을 처음 지휘하는 사람은 악보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분석하려 한다. 이를 훌륭한 외과의와 비교하면 그는 어디에 혹시 잘못될 일은 없는지, 미숙한 의사라면 어디를 걱정할지 미리 살피지만, 결정적 순간에 진실로 집중할 뿐 나머지 구간에서는 에너지를 아낄 줄 안다. 여기에 대해 카라얀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많은 젊은 지휘자들은 지금의 나보다 콘서트 후 더 많이 지친다. 하지만 1938년 내가 트리스탄을 처음 지휘했을 때는 구급차를 타고 집으로 가야만 했다.”

당시 30세의 청년 카라얀은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를 공연했는데 베를린 비평가에게 ‘카라얀의 기적(Das Wunder Karajan)’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어렵기로 유명한 바그너(Wagner)의 곡을 성공적으로 지휘해 내면서 카라얀은 당대 독일의 위대한 오페라 지휘자인 푸르트뱅글러와 드사바타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카라얀 본인은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 구급차를 타고 귀가했던 모양이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악보를 외워 지휘하는 암보법

일반적으로 지휘자가 단원들과 긴밀히 소통하기 위해 눈을 맞추는 것과 달리 카라얀은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한 뒤에는 단원들을 한 번 살펴본 후 지그시 눈을 감는다.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 공연장에 정적이 깃들 때까지 기다린다. 이윽고 절제된 동작으로 때로는 격렬한 몸짓으로 지휘하는데,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눈을 뜨는 법이 없다. 마치 명상을 하듯 절제된 몸짓과 표정으로 지휘하는데, 그의 몸으로 보여주는 언어에 관중은 최면에 걸린 듯 빠져든다. 마치 음악은 배경이 되고 지휘자 카라얀이 음악이 된 듯 느끼게 된다.

눈을 감고 지휘하는 카라얀의 스타일은 악보를 통째로 외우는 능력 덕분에 가능하다. 90~120분 공연의 악보를 모두 외우는 것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다. 카라얀의 친구 월터 레게(Walter Legge)는 이렇게 말했다.

“카라얀은 악보에 어떤 표시도 하지 않는다. 그저 고양이처럼 느긋하게 마룻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조용히 악보를 흡수한다. 수년간 그는 몸을 완전히 이완하는 법을 습득했고,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천부적인 절대음감과 박자 감각

카라얀은 개별 악기 소리와 그 악기가 내는 음을 구별한 후 잘못 연주한 연주자를 지적하는 일도 많았다. 소위 절대음감을 가진 덕분이다. 하지만 카라얀이 신경을 가장 많이 쓴 부분은 박자였다. 실제 카라얀은 기이할 정도로 예리한 박자 감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컴퓨터를 상대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는 박자가 부정확한 연주를 들으면 평정심을 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오케스트라가 음을 틀리게 연주하는 것은 참아도, 박자가 더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

흔히 자신의 심장박동과 음악의 박자가 잘 맞을 때 가장 편안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카라얀은 언젠가 자신이 녹음한 베토벤 음악을 생모리츠 리조트에 가서 듣다가 박자가 맞지 않고 불편하게 들렸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곳이 산지에 위치해 있어서 자신의 심박수가 더 빨라졌던 게 원인이었다고 한다.

모차르트와 카라얀

일찍부터 피아노 신동으로 두각을 나타낸 카라얀은 매년 대중 공연을 했다. 8세가 되던 1916년에는 음악학교 모차르테움(현 모차르테움 음악대학)에 입학해 1926년까지 재학했다. 모차르테움에서도 떠오르는 스타였던 그는 매년 열린 ‘모차르트 탄생일 기념 연주회’에 정기적으로 출연해 음악적 재능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고 한다. 하지만 재학 중에 손목 인대 부상을 당했고, 그때부터 스승의 권유에 따라 지휘를 배우게 된다.

1756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차르트 역시 세 살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이어 작곡을 하게 된다. 카라얀은 모차르트의 곡을 즐겨 연주했고, 또 모차르트에게 헌정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도 수년간 지휘를 하게 된다.

나치 당원 시절

1933년 25세의 카라얀은 나치당에 입당했다. 아마도 당시 독일에서 음악 활동을 하려면 당원이 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35년 독일의 최연소 음악 총감독(Generalmusikdirektor)이 되면서 카라얀은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그는 나치에 가담한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 앞에 종이 한 장이 놓여있었다. 서명만 하면 오케스트라만이 아니라 무한한 권력과 예산이 부여되고, 원하는 대로 연주회를 열고 연주 여행도 다닐 수 있었다. 게다가 비서와 사무실까지 따라오니 천국과도 같은 일이었다. 단지 당원이 되고, 가끔 그들을 위해 연주회를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서명했다.”

그는 나치가 아니었다면 기회주의자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1939~1945)이 계속되던 중 카라얀은 1942년 유대인 아니타 구테르만과 결혼하면서 나치의 눈 밖에 나게 된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 해고를 당한 카라얀은 이후 음악 활동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군은 그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출연을 몇 년간 정지했지만, 그래도 1946년부터는 이전처럼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카라얀은 라쌀르 신부가 쓴 〈선 명상의 실천(The Practice of Zen Meditation)〉을 통해 선불교를 만난다. 라쌀르 신부는 1929년 일본으로 선교를 떠났다가 선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고, 1960년대 삼보교단의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카라얀은 라쌀르 신부가 쓴 〈선 명상의 실천(The Practice of Zen Meditation)〉을 통해 선불교를 만난다. 라쌀르 신부는 1929년 일본으로 선교를 떠났다가 선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고, 1960년대 삼보교단의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음악을 못할 때 만난 선불교

카라얀은 1942년부터 약 5년간 음악 활동을 정지당하면서 심적인 고뇌에 휩싸인다. 고난은 인간을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2년간 영적 구도에 나선 카라얀은 요가와 선불교와 만난다. 〈선불교(Zen Buddhism)〉라는 책을 읽으며 저자인 라쌀르 신부(Hugo Makibi Enomiya-Lassalle, 1898~1990)와 가까운 관계를 쌓아간다. 독일의 제주이트교단 신부였던 라쌀르는 1929년 일본으로 선교여행을 떠났을 때 일본 선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1956년부터 선(禪)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1958년 〈선 : 깨달음의 길(Zen : A Way to Enlightenment)〉을 출간한 라쌀르는 1960년대에 야스타니 법맥의 삼보교단(三寶敎團)에서 선사로 인가까지 받는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이기도 했던 라쌀르는 1946년 교황의 인가를 받아 세계평화를 위해 헌정하는 성당을 히로시마에 설립한다. 1968년 이후에 라쌀르는 대부분의 시간을 유럽에서 보내며 선 안거와 선 수행을 기독교인들에게 장려했다.

카라얀은 라쌀르와의 만남에 대해 “그 책을 읽을 때 너무나 감동해 지금도 거의 대부분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마침내 신부님을 직접 만났을 때는 마치 20년은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음악은 단원과 함께하는 공안 참구

선(禪)은 카라얀의 음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 나는 ‘음악’이라는 화두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무언가 내면에서 알아채는 것을 100여 명의 단원이 함께 느낀다. 마치 비행기가 이륙할 때 느껴지는 고양감을 느낀다.”

그의 말을 통해 ‘마음챙김’과 ‘집중’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이 그의 음악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더욱이 카라얀은 ‘무아(無我)’의 개념을 알았고, 이를 자신의 음악에도 접목했다.

“불교의 언어는 ‘내가 활을 쏜다.’, ‘내가 작동시킨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이 활을 쏜다.’, ‘그것이 작동시킨다.’고 말한다. ‘그것’은 나를 넘어선 무언가가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나는 단지 처음에 컨트롤을 할 뿐 그 후에는 다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음악을 만든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 그것이 옳은 상태임을 나는 안다.”

단순한 음악, 더하기보다 빼기

클래식을 즐겨듣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통해 카라얀의 음악을 쉽게 감상할 수 있다. 공상과학 영화의 선구자라는 평을 듣는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면 오프닝에 카라얀이 빈필하모닉과 함께 연주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곡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를 들을 수 있다. 러닝타임 139분에 대사는 40분에 불과하니 영화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시간을 관객은 무성영화처럼 화면만으로 교감해야 하는 영화다. 거대한 흑색 화면에 둥근 행성과 그 너머 지구가 등장하면서 연주되는 음악은 선의 깔끔함과 단순성을 잘 보여준다. 우주정거장과 만나는 장면에서는 푸른 허공에서 가볍게 부유하는 모습이 베를린필과 카라얀이 연주하는 왈츠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통해 잘 조명된다.

‘소욕지족’, ‘더하기보다 빼기’라는 의미의 ‘Less is more’를 실천한 다른 음악가로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가 있다. 1940년 출시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8편의 클래식 음악이 사용되었는데 모두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했다. 신지학회(神智學會) 회원이었던 스토코프스키는 청중이 음악에만 집중하도록 하려고 ‘선’의 기술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관객·관중이 온전히 음악에 집중하도록 유도하고자 사용한 다양한 ‘선’의 기술은 카라얀에 이르러 더욱 활성화됐다고 볼 수 있다.

일부 클래식 음악 관계자는 현대 클래식 음악이 ‘더하기보다 빼기’에 주목한 과거의 클래식 음악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관습을 줄이고 음악에 대한 집중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연주에서 음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문을 두드리는데 “저리 가, 나는 진리를 찾고 있어.”하며 진리를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영화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1968년 개봉한 SF영화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에서는 카라얀이 빈필하모닉과 함께 연주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곡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를 들을 수 있다. 사진은 곡이 수록된 앨범.
영화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1968년 개봉한 SF영화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에서는 카라얀이 빈필하모닉과 함께 연주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곡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를 들을 수 있다. 사진은 곡이 수록된 앨범.

현대화를 위한 노력과 음악적 업적

172cm. 서양인으로서는 작은 키였지만 조각 같은 얼굴, 철회색에서 흰색으로 변해가는 머리카락, 감은 눈에 꿈꾸는 듯한 얼굴로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영화와 텔레비전을 통해 대중에게 크게 어필했다. 또한 그가 지휘해 녹음한 800곡이 실린 앨범에 대해 독일 최대 음반회사 도이체그라마폰은 ‘아마도 수억 장’ 판매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카라얀은 의사였던 아버지를 매우 존경했다. 의사였던 아버지가 나이가 드셨을 때 하신 말씀을 늘 가슴에 간직하고 음악 인생에 접목했다.

“종국에는 기술을 배울 수 있지만 그 기술을 통해 나오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네가 주는 것이다. 사체는 수술하지 않는 것임을 잊지 말아라. 너는 살아있는 몸을 수술하는 것이다.”

카라얀이 취임했을 때 많은 단원이 은퇴 연령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젊고 현대적인 오케스트라를 만드는 일의 일환으로 여성들을 기용하려 했지만, 남성만으로 구성되어 있던 단원들의 저항을 많이 받았다. 특히 1982년 클라리넷 연주자로 23세의 여성 사비네 마이어를 영입하려 하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엄청나게 저항했고, 결국 마이어는 후보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이후 카라얀은 자신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베를린필은 물론 서독 상원과도 많은 다툼과 신경전을 벌였다. 좌익 성향의 녹색당이 정권을 잡자 카라얀의 위치는 더욱 미약해졌고, 결국 1989년 4월 상임지휘자직을 사임했다.

베를린필과 알프스를 사랑한 사람

“더 이상 음악을 할 수 없게 된다면 나는 살고 싶지 않다.”

언젠가 카라얀은 이렇게 말했다. 베를린필을 4월에 사임한 카라얀은 7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35년(1955~1989)이라는 음악 인생을 바친 베를린필이 삶의 의미였던 것일까? 물론 그 사이에도 빈필하모닉을 지휘하여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연주했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준비하며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 리허설을 하기도 했다.

완벽한 음악 외에 사생활에서도 자신의 비행기를 소유한 ‘아마추어 비행사’, 대담무쌍한 ‘스키어’, 모험과 완벽을 추구했던 ‘등산가’였지만 노년에는 심장과 척추 질환을 앓았다. 잘츠부르크 남쪽,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434m 고도의 도시 아니프에 자리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진 카라얀은 구조 헬리콥터가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

선불교 수행자였던 카라얀은 환생을 믿었고, 평소 사후에는 독수리로 태어나 자신이 사랑한 알프스 상공을 날아오르겠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사람은 나이가 들면 귀소본능이 되살아나게 마련. 77세가 되던 1985년 성베드로성당에서 열린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의 성찬식’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재하는 미사에서 카라얀은 ‘모차르트 대관식’을 지휘했고, 이때 교황에게서 부인과 딸과 함께 성체성사(聖體聖事)를 받았다. 말년에 가톨릭교회와 화해를 한 것이다.

눈을 감고 지휘하는 카라얀의 스타일은 악보를 통째로 외우는 능력 덕분에 가능했다. 90~120분 공연의 악보를 모두 외우는 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다.
눈을 감고 지휘하는 카라얀의 스타일은 악보를 통째로 외우는 능력 덕분에 가능했다. 90~120분 공연의 악보를 모두 외우는 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다.
진우기
불교·명상 전문 번역·통역가이며 로터스불교영어연구원 원장이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Texas A&M University에서 평생교육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에서 불교명상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저서로 〈달마, 서양으로 가다〉가 있고, 그 밖에도 수행·명상서 번역과 국제회의 통·번역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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