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소원 들어주는
존재가 아님을 알고
계 지키며 경건한 삶 살아야

위사카는 붓다 시절 믿음이 견고하고 승가에 아낌없이 시주하기로 으뜸인 재가여성불자다. 영리하고 사리분별이 밝았던 위사카는 당시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남편들은 자기 아내가 위사카를 따라다니기를 원했다. 따라다니기만 해도 좋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느 날 포살일이 다가왔다. 포살은 스님들이 모여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계율을 잘 지키고자 다짐하는 의식인데 재가자도 그날이면 절에 모여서  수행자처럼 경건하게 지냈다. 

사밧티 시에 사는 수많은 여성이 포살일을 보내고자 부처님이 계신 절에 모여들었다. 위사카는 여성들 가운데 나이 많은 여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포살에 참석했습니까?”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소. 죽어서 천상에 나고 싶어서 포살에 동참했소.”

중년여성에게 다가가 물었더니 그 여인이 답했다.

“평생 남편에게 매여 살았소. 이제는 거기서 좀 풀려나게 해달라고 비는 심정으로 동참했소.”

다시 젊디젊은 여성에게 포살에 참석한 까닭을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결혼을 했는데 빨리 아이를 낳고 싶어서 포살에 참석했습니다.”

위사카는 여인들을 이끌고 부처님에게 나아가서 포살에 임하는 초·중·노년 여인들의 생각을 들려드렸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목동이 막대기를 들고 때리면 소들은 목초지로 내보내집니다. 그렇듯 사람은 생로병사에 내몰립니다. 태어남은 늙음으로, 늙음은 병듦으로, 병듦은 죽음으로 사람을 몰아갑니다. 그러다 목숨을 마치고 맙니다. 그런데 아무도 태어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절에 와서 기도를 하고 포살일을 지키면서도 결국 그들이 구하는 것은 다시 태어남(윤회)입니다.”(<담마빠다>135번째 게송의 인연이야기)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에도 지금처럼 절에 와서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비는 기도를 올렸을까? 부처님은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존재가 아니라, 덧없는 삶에 진정한 가치를 심어주는 법문을 들려주는 스승 같은 분이었다. 

하지만 위사카의 이 일화를 보면 사람들은 계를 지키고자 절에 왔던 그때에도 맘속으로 바라는 것이 따로 있었다. 부처님이 그런 소원을 이뤄줄 리가 없음을 알기에 아마 재가신자들은 속으로 그런 소망을 품고서 계를 지키며 하루를 경건하게 보냈을 것이다.

부처님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전해 듣고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그런 소망은 또 다른 생로병사의 윤회를 부를 뿐이라는 것이다. 설령 그런 소망을 빌어서 이뤄졌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이것이 이뤄지기를’, ‘저것이 이뤄지기를’ 빌기만 할 뿐, 자신의 삶 자체를 차분히 바라보거나 들여다보지 못한 채 생을 마친다는 것이다. 거친 세상에서 소망을 품는 것을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불교가 진정 무엇을 말하는 종교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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