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호

큰 죄업·소소한 허물
상쇄하는 길은 오직 ‘참회’

― 글 구미래

세 가지 거울에 담긴 업의 의미

송광사 선방 한가운데는 부처님 대신 커다랗고 둥근 거울이 자리하고 있다. 촛대와 향로가 놓여있어 불단을 상징하니, 그 앞에 합장하고 선 수좌는 거울에 비친 본래성불(本來成佛)의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셈이다.

거울은 다양한 상징성을 지녔다. 선방 불단에 걸린 거울이 우리의 본래면목인 ‘청정한 불성(佛性)’을 깨닫게 하는 힘을 지녔다면, 일상의 수행과 관련된 거울은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비춰보는 성찰의 거울이다. 〈중아함경〉 ‘업상응품(業相應品)’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부처님이 라운 존자에게 물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거울을 쓰는가?” 라운 존자는 “얼굴이 깨끗한지 깨끗하지 않은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부처님이 설하였다. “그렇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일 네가 장차 몸으로 업을 짓고자 하거든 반드시 그 업을 비추어봐야 한다. 이 몸으로 지을 업이 깨끗한지 깨끗하지 않은지, 나도 위하고 남도 위한 일인지 관찰해야 한다.”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부처님은 자신을 비추되, 외양만이 아니라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업(業)을 있는 그대로 비춰볼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미 지은 업이든 앞으로 지을 업이든,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녀야 할 거울은 인과응보의 업을 새기며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살아가도록 비추는 성찰의 거울, 사색의 거울이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거울이 있다. 많은 이들이 잘 알고 있는 거울로, 죽은 뒤 명부 시왕의 심판을 받을 때 생전에 지은 업을 비추는 제5 염라대왕의 거울 ‘업경대(業鏡臺)’이다. 〈시왕경〉에 “다섯 번째 염라에는 다투는 소리 그치고 죄인들의 마음에 한이 서려 달가워하지 않네. 머리채 잡힌 채 고개 들어 업경을 보니 비로소 생전에 지은 일 분명하게 깨닫네.”라 하였다. 망자는 중죄인처럼 취급받는 것이 억울했으나, 업경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는 내용이다.

고려 후기의 ‘시왕도’를 보면 업경대에는 망자가 소를 죽이는 장면이 나타나 있고, 소ㆍ오리ㆍ개가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기록한 문서를 입에 물고 염라대왕 앞에 호소하는 모습까지 그려져 있다. 생전의 죄업이 CCTV처럼 찍혀 생생히 드러나고, 피해자들의 증언까지 빠짐없이 따르니 망자의 죄값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이는 업의 과보(果報)를 내리는 것은 염라대왕도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스스로에 의한 것임을 뚜렷이 말해 준다.

따라서 부처님은 “허공에도, 바닷속에도, 바위틈 속에도 자신이 행한 악업은 숨길 수 없다.”고 설하였다. 모든 의도적 행위는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아 선행에는 선과(善果), 악행에는 악과(惡果)가 따른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자연의 법칙처럼 자기가 짓고 받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 철두철미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현세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두 가지 거울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뒤에 직면하게 될 거울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살아 있을 때 거울을 잘 닦아서 간직해야 한다. 두 번째 ‘성찰의 거울’로 평소 자신을 돌아보는 삶을 살아간다면, 첫 번째 ‘본래성불을 비추는 거울’의 면모를 사무치게 느낄 것이다. 그렇게 인과의 도리를 믿고 사노라면 세 번째 ‘업의 거울’ 또한 아예 만날 필요가 없게 된다.

조계총림 송광사 선방에 걸려 있는 거울 불단. 〈사진=문광 스님〉

업은 ‘다음 생’을 결정하는 동력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지만, 불교에서는 죽은 뒤 오직 업만이 나를 따른다고 본다. 윤회하는 모든 존재에게 ‘축적된 업’은 다음 생의 모습을 결정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교의 업설(業說)은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보편의 원리이다. 〈불설무량수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끝내 따르는 것은 하나도 없고, 선악의 업력으로 화와 복만이 몸을 받을 때마다 따라다녀서, 혹 즐거운 곳에 나기도 하고 혹 괴로운 곳에 나기도 한다. 선악과 화복은 운명을 좇아 나는 것이라, 어느 때는 즐겁고 어느 때는 괴로워하다가 후회하게 되는 것이니 다시 어찌할 수 있겠는가.

본디 업은 팔리어로 ‘행위(Karma)’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모든 행위를 업이라 하지 않고, ‘의도적 행위’만을 업이라 본다. 부처님은 “나는 업을 ‘의도’라 설명한다. 의도를 통해 사람은 몸과 입과 뜻으로 행동한다.”고 설하였다. 〈중아함경〉 ‘사경(思經)’에서 부처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혔다.

만일 의도하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그것은 반드시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혹은 후세에서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의도하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그것은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업은 선한 마음 혹은 선하지 않은 마음 등의 의도를 가지고 지은 행위이며, 그러한 행위에 상응하는 과보가 현세 또는 다음 생에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이 불교 업설의 기본 뜻이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동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이에 따라 업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지만, 어느 정도의 결과론을 수용하고 있다.

고의성이 없는 행위에도 과보가 있다는 내용을 〈현우경(賢愚經)〉에서 살펴보자. 어떤 사미승(아들)이 비구승(아버지)을 부축하다가 잘못하여 넘어뜨려 죽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인과가 있었다. 오랜 과거 생에 죽은 비구승이 아들이고 사미승은 아버지였으며, 아들은 아버지를 몹시 귀찮게 하는 파리를 몽둥이로 쫓으려다 그만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의도적 살인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따름을 말해 주고 있다.

〈현우경〉에서 과거 생의 아들이 지은 것은 10악업(惡業) 가운데 ‘어리석음’의 악업에 해당한다. 몸으로 짓는 살생·투도·사음의 신업(身業), 입으로 짓는 망어·양설·악구·기어의 구업(口業), 마음으로 짓는 탐욕·분노·어리석음의 의업(意業)은 모두 악업이다. 비록 ‘어리석음’에 고의성이 없다 하더라도 이는 악업이기에 과보가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업과 관련해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살아가면서 쉽게 지을 수 있는 ‘구업’과 ‘의업’이다. 어린아이도 선악의 여부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행위는 스스로 통제가 가능하다. 그런데 남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말, 이간질, 괴롭히는 말, 꾸며서 하는 말, 탐욕, 분노, 어리석음’ 등 구업과 의업은 일상의 흐름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빠져들 수 있으므로 특히 조심해야 한다.

이를테면 SNS에서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익명성에 숨어 악성 댓글을 다는 이들이 많다. 별생각 없이 쓴 한 줄의 글,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 말이 상대에게 비수로 꽂힐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따라서 사리를 분별하는 지혜, 남의 아픔을 헤아릴 줄 아는 공감력, 무엇을 하든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살피는 마음이 악업을 피하는 지름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업을 상쇄하는 ‘참회’

누구든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잘못을 짓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이 쌓아온 업에 대해 별다른 생각도 참회도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참회는 큰 죄에만 따르는 게 아니라 기억하지 못할 소소한 허물에도 필요하다. 이미 지은 업을 상쇄하는 길은 오직 참회뿐이기 때문이다. 공덕과 선행도 업을 없애는 적극적인 길이지만, 이 또한 참회가 앞서야 한다. 누군가에게 해를 입혔을 때,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물질적 도움만 준다면 진정한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참회의 자리는 과거의 업을 푸는 동시에 새로운 업을 만드는 자리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참된 기도는 ‘지극한 참회’에서 시작한다. 지심참회는 이전과 다생(多生)에 지은 죄업을 무조건 참회하는 것이며, 자비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기도 한다. 그것은 참회하는 마음이 가장 순수하기 때문이고, 참회는 자신과 마주하여 화해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기도에서 참회는 부처님과 만나기 위한 자기 정화(淨化)이다. 천도재에서 관욕(灌浴)으로 영가의 업을 씻어준 뒤 부처님 앞에 나아가듯이, 스스로 올리는 기도에서 죄업을 참회하지 않은 채 부처님의 자비를 바라기는 어렵다. 이처럼 참회하지 않는다면 악업이 축적될 뿐이니 참회 없는 이의 기도는 모래 위에 짓는 집처럼 헛되다. 업경대 앞에 서 있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업을 돌아보고 참회하는 데서 참된 기도와 수행이 시작된다.

원효 스님은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이 조화를 이룬 참회법을 일러주었다. 부처님의 자비에 의지해 절과 염불로써 지은 죄를 참회하는 사참으로 시작하여, 죄업의 실상을 직시하는 이참으로 참회를 마치도록 하였다. 죄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육정(六情)이 번뇌를 일으킨 데 불과하니, 이를 꿰뚫어 보아 참된 참회로 일어서라는 것이다.

방일하여 뉘우침과 부끄러움도 없이 죄업의 실상을 능히 사유하지도 않는다면, 비록 죄업에 성품이 없다고 하여도 장차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니, 마치 환술로 만들어진 호랑이가 도리어 환술사를 삼켜버리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에 남긴 원효 스님의 말씀이다. 이처럼 원효 스님은 참회가 곧 ‘꿈을 깨는 노력’이라 보았다. 마음이 지어낸 번뇌가 그림자나 꿈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해결의 실마리는 우리가 얽매여 괴로워하는 그 모든 것이 본래 내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부처님 앞에서 내가 지은 허물을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그 죄의 실상이 본래 무상함을 관하니 그야말로 ‘참회삼매’라 하겠다.

참회가 주로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면, 공덕은 행동으로 짓는 것이다. 참회로 악업을 녹이고 공덕을 지어 선업을 쌓는 것이기에, 실천하는 보살행이야말로 적극적인 참회로 나아가는 길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참회에서 출발하여 행으로 이어지는 것이 올바른 신행이라 보고 있다.

염라대왕 앞의 망자와 업경대.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시왕경〉의 ‘제5 염라대왕 변상도’.
염라대왕 앞의 망자와 업경대.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시왕경〉의 ‘제5 염라대왕 변상도’.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하는 업

업은 왜 과거지향적일까? 우리는 업에 대해 생각할 때면 늘 지난 시간의 허물을 떠올리며 전전긍긍한다. 업은 지금 이 자리에서 무르익고 있는데도 말이다. 따라서 업을 전생-현생-내생이라는 거시적 ‘윤회’의 관점에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업의 과보를 받는 시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업의 무게는 결과가 일어나는 시간에 영향을 미친다. 누구에게나 지탄받을 만한 악행을 저지르면 즉시 사회적 제재가 따르듯이, 무거운 업일수록 과보가 빠르다는 이치이다. 이는 업보가 현생에서 관찰될 수 있으며, 반드시 윤회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전생의 업뿐만 아니라 현생의 업이 지금의 삶을 규정한다는 것에 대해, 부처님은 〈대승열반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나의 불법 가운데는 과거의 업도 있고 현재의 업도 있다. 그런데 그대는 그렇지 아니하여, 오직 과거의 업뿐이요 현재의 업은 없구나.

업은 스스로 짓고 받는 합리적 원칙이지만, 과거·현재·미래와 연결하면서 마치 숙명론처럼 받아들일 수 있음을 경계하는 가르침이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와 윤회가 생을 달리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일상에 적용되고, 육도의 세계는 매 순간 펼쳐진다고 본다. 마음이 탐진치로 뒤덮여 있으면 그 순간이 지옥이요, 고요한 상태에서 지극한 선이 피어오르면 그 자리가 천상과 다름없다. 따라서 업의 해결책은 오직 ‘지금 이 자리’임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과거의 업 때문에 불평등하게 태어남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태어난 이후의 업은 자신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현재의 내가 어찌할 수 없이 맞닥뜨린 전생의 업은 받아들이되, 주어진 인연 속에서 늘 자신을 단속하며 깨어있으라고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주어진 모든 것을 무조건 개인의 업으로 돌려야 할까? 우리는 지극히 선하고 이타적인 사람이 평생 힘겹게 살아가다가, 또다시 고통과 시련이 겹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인도의 불가촉천민은 전생에 어떤 업을 지었길래 헤어날 수 없는 신분의 굴레에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나의 업’으로만 받아들이기 힘든 이러한 현실과 관련해 〈대승열반경〉 ‘교진여품’의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일체중생이 현재의 ‘사대(四大)’와 ‘시절(時節)’과 ‘토지(土地)’와 ‘인민(人民)’들로 인해 고통과 안락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체중생이 모두 과거의 본업(本業)만으로 인해 고통과 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한다.

이는 ‘공업(共業)’이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말이다. 박경준 선생은 이에 대해 ‘사대’와 ‘토지’는 자연환경을, ‘시절’은 시대상황을, ‘인민’은 사회환경을 뜻한다고 보았다. 과거의 본업이 인(因)이라면 자연환경·시대상황·사회환경은 연(緣)으로, 인과 연이 결합해 고통과 안락의 과(果)를 낳는다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이러한 환경과 상황은 개인의 업과 무관하지만, 나를 포함한 일체중생이 집단으로 쌓아온 공업의 산물이다. 이러한 공업은 인연 따라 특정 개인에게 더 큰 결과로 돌아가기도 한다.

과보의 원인이 각자의 업뿐만 아니라 공동의 업에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 어깨에 짐을 하나 더 얹어주는 듯하다. 그러나 개인주의·환경 파괴 등 인류의 제 문제에 직면해 있는 우리는 이를 잘 알고 있다. 실제 개인의 잘못만이 아닌데도 개개인이 과보를 받고 있다. 그 해결책은 공동체가 함께 선을 추구할 때 찾을 수 있다. 부처님은 이제 우리에게 화두를 던진다. “이 세상에 태어나 나의 인과응보를 계산하며 전전긍긍 살 것인가? 한 걸음 나아가 나와 남을 함께 살리는 자리이타의 삶을 살 것인가?”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 올해 내가 지은, 우리가 지은 업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구미래
불교민속학 박사. 동국대·중앙대ㆍ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등에서 불교의 의례·무형유산·세시풍속 등에 대해 강의했고, 현재 불교민속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저서로 〈한국불교의 일생의례〉·〈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존엄한 죽음의 문화사〉·〈한국인의 상징세계〉 등이 있다.

 


명사의 업경대 ― 글 한승원

깊어 가는 가을밤
업경대 앞에 서 있었다

〈석씨원류응화사적〉 중 ‘어인구도(漁人求度)’.
〈석씨원류응화사적〉 중 ‘어인구도(漁人求度)’.

간밤 업경대 앞에 서 있었다. 내 영혼은 나도 모르는 새 알 수 없는 이유로 검은 도포의 사자들에게 이끌려 염라대왕의 업경대 앞으로 가 있었다.

업경대는 커다란 텔레비전의 브라운관 같았는데 거기에는 내 일생의 삶이 영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운명 속에서 회개, 혹은 개과천선이나 참회를 위한 장치라고 알려져 있었다.

어리둥절 당혹스러웠다. 나는 별 하나 떠 있지 않은 새까만 밤의 사막 길, 바람 한 점 없고 파도도 없는 죽어버린, 숨을 멈추어 버린 듯 무슨 흉측한 냄새가 가득 차 있는 바다를 무동력선을 타고 왔다. 노를 젓는 검은 옷차림의 사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 젓는 소리도 물 헤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를 이끌고 가는 검은 도복의 남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 바다를 건너 까만 배들이 정박해 있는 포구에 도착했다. 검은 도복의 남자는 나를 이끌었다. 내 영혼은 개처럼 이끌렸다.

업경대를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난 염라대왕이 나를 향해 물었다.

“그대는 고집스러운 한 곬의 삶만을 살았군.”

염라대왕이 있는 방은 마치 범죄인을 구속할 것인가, 석방한 채로 재판을 받게 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구속적부 심사장 같은 분위기였다.

“그대는 그냥 막 살았어. 이상스러운 자아로, 자기의 시와 소설, 에세이 따위를 쓰고 사는 삶이 최대 최고 지선(至善)의 삶이라는 고집 하나로……. 그대는 파시스트 같은 고집을 신념이라고 여기겠지. 이념에 얽매인 사람들을 비웃으면서 자기는 문학적인 교조주의, 문학 지상주의를 신봉하고…….”

나는 침묵했다. 우주적인 원리와 질서를 바탕으로 인간의 일생을 재구성하고 그가 죽음을 맞으면 다음 생을 선택[윤회]하게 하는 장치로서, 육도환생을 위한 업경대를 나는 믿지 않았으므로. 인간이 한 생을 산 결과에 따라 죽은 다음 벌레로, 기는 짐승으로, 네 발 짐승으로, 천민으로, 양반으로, 극락에 가는 깨달은 자로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

나는 카필라 신화를 알고 있다.

어떤 늙은 어부의 그물에 괴이한 물고기 한 마리가 걸렸습니다. 한 몸뚱이에 백여 개나 되는 머리를 가진 물고기 말이지요. 어부는 그것을 모래밭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원숭이·뱀·말·여우·돼지·토끼·쥐·사자·호랑이·말·소·기린·닭·독수리·잉어·고라니·노루·사슴·낙지 따위의 머리를 한 개씩 달고 있었고, 몸통과 꼬리는 고래의 그것이었습니다. 그 괴이한 물고기를 모래밭으로 끌어 올려놓은 어부는 지나가는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물고기인지 여쭈었습니다.

(전생과 내세를 환히 뚫어보는 눈을 가지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 물고기 옆으로 다가가서 “너는 카필라가 아니냐?”하고 말하자, 그 물고기의 모든 머리가 일제히 끄덕거리며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부와 뒤따르는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카필라는 전생에 브라만 출신의 승려였는데, 영리하고 부지런했기 때문에, 여러 고전과 경전을 읽고 거기 나오는 지혜를 일찍이 습득한 나머지, 자비롭지 못하고 오만해지기만 해서 자기의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도반이나 후배 수행자들에게 ‘이 미련스러운 닭대가리야, 개 대가리야, 호랑이보다 못한 대가리야, 아이고 이 원숭이 대가리야, 낙지 대가리야.’라고 빈정거리면서 비웃곤 한 업이 쌓이고 쌓여 다음 생에서 이러한 수중 괴물 카필라가 된 것이니라.”하고 말했습니다.

육도환생의 윤회를 나는 불교의 정석으로 믿지 않았다.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으면 곧 극락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설했다고 생각했으므로. 나는 석가모니의 말씀과 조사들의 행장을 따라 살았으므로.

나는 염라대왕에게 말했다.

“왜 내가 여기 와 있는지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일 터입니다. 오래전부터 꿈을 꾸면 늘 길을 잃고 지옥 세상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나는 내세를 믿지 않습니다. 육신이 죽더라도 영혼이 다음 생을 이어받아 다시 한 생을 산다는 영혼불멸(육도환생)을 믿지 않습니다.”

“이 사람 고집은 여전하군.”

나의 고집을 보고 염라대왕이 특별한 육도환생, 어쩌면 강철이나 화강암 따위의 무생물로 몇천 년을 살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염라대왕이 그러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겁내지 않고 말했다.

“다행인지 모르지만 나는 고명한 스님을 찾아다니며, 조사들의 삶을 임모(臨摸)하며 참선공부를 했습니다. 축생·지옥에 떨어지는 까닭을 읽었고, 축생·지옥을 한순간에 벗어나는 지혜를 터득했고,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처럼,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구름처럼 마음을 비우고 살았습니다. 노자처럼 장자처럼 원효 스님처럼 어디에도 걸림 없이 살았습니다.”

염라대왕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원효나 노자·장자의 흉내를 냈겠지. 탐욕을 버렸다며 명예를 탐하고, 술을 진탕 마시고 남의 여자 훔치는 것을 낭만이라 합리화하고, 고기 먹고 거짓말하고……. 그냥 막 살아버린 것이겠지.”

나는 반발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는 저의 영혼을 애완견처럼 묶어놓고 살지 않았습니다. 자유인으로 산 것이지요. 아나키스트처럼 선승처럼 훨훨 자유롭게 살아온 것이지요.”

염라대왕이 빈정거렸다.

“아마 원효 스님 같은 무애의 삶을 살았다고 자랑하는 모양인데, 그게 건방진 막 살아버리기인 것이야.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시쳇말이 바로 그런 것이지.”

“그렇게 저를 폄훼하시면 억울합니다. 저는 평생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새 윤리를 제시하며 도 닦듯이 살았습니다.”

“당신은 회개할 줄을 모르는군.”

죄를 짓지 않았는데, 무슨 회개를 한다는 것인가? 나는 회개라는 말에 짜증이 났다. 회개라는 말을 들으면 ‘인간의 원죄를 벗어나려 회개한다.’는 어떤 종교인들의 말이 떠오른다.

염라대왕은 말했다.

“소설가로서 시인으로써의 삶. 자기의 삶이 최고의 삶은 아닌데, 그 삶에 취해 살았군. 그 외의 다른 삶을 산 사람을 비웃으며……. 봉사할 줄도 모르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삶만 살았어. 오직 자신과 자식, 형제만을 위한 삶.”

“저는 삿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저를 증오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자기를 희화시키면서 즐긴 것이니 그것이야말로 사악한 짓이지. 당신은 그것을 회개할 줄 몰랐다. 그런 채로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파렴치한 삶을 산 것이지.”

“그럼 시와 소설을 쓰고 살아온 삶을 후회하고 어떤 새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후회하고 회개하고 잘못된 삶을 되돌려 살기로는 이제 너무 늦었다.”

염라대왕은 업경대의 영상을 끄고, 나에게 다음 생의 삶을 명하고 있었다. 지금의 사람탈을 벗고, 눈도 귀도 없는 몸으로 기어다니며 살아야 하는 지네의 한 생을 명하고 있었다. 아, 나는 한 마리의 지네가 되었다. 새까만 등가죽에 마흔여덟 개의 황금색 발과 머리에 달린 두 개의 독 이빨을 가진 지네. 내가 토굴살이를 하면서 가장 증오한 독충인 지네의 삶.

토굴 안으로 기어가는데, 누군가가 집게로 나의 몸통을 집어 들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꿈에서 깨었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한 업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이성을 사랑해야 하고, 먹어야 하고, 맵시 있게 잘 입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기호식품을 마시고 먹고 즐겨야 한다. 업보는 내가 지은 업장이므로 내가 갚아야 하는 누대의 빚이다. 업은 나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내가 회개를 통해 갚아야 한다. 내가 지은 것을 내가 다 갚지 못하면 후세에게까지 물려지는 것일 수도 있다.

수도하는 스님들의 세계에서는 보임(保任)이란 것이 있다고 들었다. 보임은 거울에 끼인 먼지나 때처럼 수시로 닦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나의 후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한승원
소설가.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소설 원효〉·〈초의〉·〈다산〉·〈산돌 키우기〉 등 다수의 소설을 썼다. 현대문학상·한국문학작가상·이상문학상·대한민국문학상·한국소설문학상·한국해양문학상·한국불교문학상·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명사의 업경대 ― 글 유자효

다낭에서 떠올린
베트남 전쟁

폐타이어 조각으로 만든 신을 신고 구식 무기로 대항하던 북월맹은 세계 최강인 미군의 군사력 지원을 받던 월남을 통일시켰다. 월남 지도부가 부패와 타락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업의 작용은 개인이나 나라나 다를 바 없다. ⓒGettyimagesBank 
폐타이어 조각으로 만든 신을 신고 구식 무기로 대항하던 북월맹은 세계 최강인 미군의 군사력 지원을 받던 월남을 통일시켰다. 월남 지도부가 부패와 타락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업의 작용은 개인이나 나라나 다를 바 없다. ⓒGettyimagesBank 

2023년 10월, 여기는 베트남. 야자수 숲이 남국의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긴다. 한때 미군 기지가 있었고, 미군들의 휴양지이기도 했던 장려(壯麗)한 다낭(Da Nang) 해변을 외국인 관광객들이 즐기고 있다.

천혜의 해안선을 따라 발을 적시니 의외로 따스하다. 따뜻한 바닷물이라니······. 한여름에도 바닷물은 섬뜩함이 느껴져야 정상이거늘 이 또한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 아닐까 두렵다.

인천발 다낭행 비행기는 하루 17편, 한국인들을 가득가득 실어 날라 도처에서 들리는 한국어에 ‘경기도 다낭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됐다.

한국인 관광객의 대부분은 젊은 부부,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많다. 승무원들도 아이들에게는 각별하게 친절했다. 아마도 우리 부부가 가장 늙은 승객으로 짐작되는 대한민국 국적기에는 젊은 기운이 넘쳐흘렀다. 평화·휴가·연휴·여행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들인가? 다낭의 대표적 관광지 바나힐에는 베트남기 5개, 태극기 3개, 인접한 중국기와 캄보디아 국기가 하나씩 게양돼 있으니 한국의 위용을 느낄만하다.

시간을 54년 거슬러 1969년 10월, 육군 사병으로 입대해 보니 월남 파병이 한창이었다. 월남 차출령이 내려오면 부대는 한동안 술렁였다. 자발적으로 차출에 응한 사병은 주로 시골 출신이거나 가난한 집안의 청년이었다. 월남에 가면 전투 수당 등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말도 돌았다.

당시만 해도 한글을 제대로 못 읽는 사병들이 있었다. 대학 재학 중에 입대했거나, 웬만큼 사는 집안 출신들은 어떻게 해서든 월남 차출을 피하려 발버둥 쳤다.

훈련소에서 취사 병과를 받아 기성 부대 취사병으로 배치된 나를 선임병들은 배려해 주었다. 고깃국이 나오면 듬뿍 떠주기도 했고, 트럭에서 쌀가마니를 져 나르는 사역에는 슬쩍슬쩍 빼주기도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중대장이 나를 중대본부 행정병으로 데려갔는데, 부대 본부로부터 빗발치듯 내려오는 월남 차출 임무가 내 차지가 되었다. 취사반에서 나를 배려해 주던 고참병들이 월남 차출을 자원해 왔다. 그들이 떠나고 짧게는 몇 달, 길게는 1·2년 뒤 전사 통보가 오곤 했다. 지금도 가끔 어려운 시절을 보내다 월남에서 산화한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전쟁은 죽음을 낳고, 죽음은 전쟁을 확산시킨다. 그 무서웠던 전쟁터를 지금의 젊은이들은 알 턱이 없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한국 관광객을 맞아 호황을 누리고 있는 베트남인들은 어떤 감정일까? 그 주된 손님들이 한때 목숨을 걸고 싸웠던 미국과 한국인들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까? 돈 많이 벌어서 다시 와달라는 베트남 가이드의 말이 진심일까? 전쟁 때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 태어난 라이 따이한들은 우리의 업이 아닐까?

1974년 12월,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한 달 동안 견습을 마친 뒤 각 부서로 배치되었다. 나는 외신부 근무를 명받았고, 외신부로 가니 아시아를 담당하라고 했다. 그런데 1975년이 되자 월남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1923~)와 레둑토(黎德壽, 1911~1990)의 월남 평화협정 뒤에 미군 철수가 끝나자 북월맹의 대공세가 개시된 것이다. 그 막강했던 월남군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월남은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렸다. 매일매일 어느 도시, 어느 도시가 월맹군에게 함락당했다는 보도를 하는 것이 일상사가 되었다. 아시아 담당 1진은 월남으로 특파돼 떠나고 신입사원인 내가 그 엄청난 보도를 소화해야 했다. 회사에서 지새며 아침 뉴스부터 정오 뉴스, 2시 뉴스 쇼, 저녁 뉴스, 9시 뉴스, 마감 뉴스에 이르기까지 숨 가쁘게 기사를 써 나르고 보도했다.

그 가운데에도 다낭의 실함(失陷)과 고도(古都) 후에(Hue)의 실함이 주는 충격이 컸다. 마침내 4월 30일, 미국의 마지막 헬기가 대사관 옥상을 떠나자 베트남은 월맹에 의해 통일되었다. 월남이 자랑하던 휴양지 다낭. 그곳에 이제는 내가 와있다.

월남전 당시 자진해서 갔던 장병들 가운데는 문인들도 있었다. 나의 고등학교 동창인 동인문학상 수상 작가 박영한은 월남 종군 체험을 소재로 〈머나먼 쏭바강〉이란 소설을 써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내가 일하던 SBS가 그의 소설을 드라마로 내려고 했을 때 작가와 저작권 협상이 잘 되지 않아 내가 나서 해결해 주기도 했다. 나와 그의 친분을 어떻게 알았는지, 회사가 내게 중재를 요청해 왔던 것이다. 영한이가 나의 중재안을 들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던 그에게 암이 왔다. 고엽제가 원인이라고 했다. 당시는 고엽제가 그렇게 나쁜 것인지도 몰랐다. 무더운 정글, 헬기에서 뿌려대는 고엽제를 시원하다며 쫓아다니면서 온몸에 샤워처럼 맞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는지······.

보훈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박영한은 답답함을 못 이겨 환자복에 링거병을 든 채 근처의 식당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 일요일, 경기도 양주의 갤러리에 가 있는데 전화가 왔다. 영한이가 위독한데 나를 찾는다고 했다. 마침 차를 갖고 왔던 터라 나는 곧바로 그가 입원해있는 일산의 병원으로 달려갔다.

나를 본 그는 벽이 다가온다느니, 누가 자꾸 나타난다느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내가 그의 팔을 잡으니 무척 아파했다. 피부가 종잇장 같았다. 고엽제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때 실감하였다.

“암 투병보다 글쓰기가 더 고통스럽다.”던 그는 내가 마지막 본 며칠 뒤에 작고했다. 그 몇 년 뒤, 그의 아들 결혼식 때 나는 부인의 청으로 주례를 보며 친구를 추모하였다.

한국과 악연이 점철된 베트남은 이제 한국인들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전쟁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곳곳이 관광객으로 넘쳐흐른다. 공산 월맹에 의해 통일됐지만 도이모이(Doimoi) 개혁 정책에 따라 자본주의 경제를 재빨리 받아들여 신흥국가들의 선도국이 되었다.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이제 베트남은 지나친 통제로 경색되고 있는 중국 시장을 대신할 만큼 규모가 커졌다. 날로 성장하는 증권시장 규모와 부동산 시장은 세계의 고객들을 배신하지 않는다.

월남이 패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공산 베트남을 탈출했다. 보트 피플(Boat People)로 불리는 그들 중 상당수는 남태평양의 고혼이 되기도 했다. 남아 있던 월남인들은 사상 검증과 가혹한 처분을 받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또 많은 희생이 있었다.

월남을 탈출한 작가들은 국제 펜에 망명 작가센터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들은 조국의 민주화를 열망하며 공산 베트남을 비판하는 작품을 쓴다. 내가 펜에서 활동할 때 국제 행사에서 망명 월남 펜 센터의 작가와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돌아가지 못하는 조국을 그리워하며, 언젠가 민주화된 베트남에서 작품 활동을 하겠다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이제 정치이념은 사회주의지만 경제는 자본주의화한 새로운 형태의 베트남이 탄생했고, 그 파워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망명 베트남 작가가 귀향할 수 있는 날은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인간사를 비롯한 우주의 삼라만상은 업에 의해 움직인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국처럼 북은 공산 세력, 남은 자유 진영으로 분단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분단은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미국과 한국이 참전하는 국제전으로 비화하였다. 미국의 물량 공세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때마침 미국을 강타한 반전 분위기로 숱한 인적 물적 피해만 남긴 채 미군은 월남에서 철수했다.

자동차 폐타이어 조각으로 신을 만들어 신고 구식 무기로 땅굴에 은신하며 항전하던 군대가 세계 최강의 군사력 지원을 받는 강국을 이기는, 상식을 뒤엎는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부패와 타락이 그 원인이었다고 분석한다.

업의 작용은 개인이나 나라나 다를 바 없다. 나의 행동이 나의 업을 형성하며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올해 지은 나의 업이 나의 운명을 규정하듯이 나라의 업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그것을 나는 반세기 너머 직접 간접으로 연관되며 지켜봐 온 베트남의 경우에서 확인한다. 이는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반면교사가 된다.

업이여, 운명이여, 생사의 갈림길이여.

유자효
(사)한국시인협회장·지용회장을 맡고 있다. KBS 유럽총국장·SBS 이사·한국방송기자클럽회장을 역임했다. 시집 〈신라행〉·〈세한도〉·시집소개서 〈잠들지 못한 밤에 시를 읽었습니다〉·번역서 〈이사도라 나의 사랑 나의 예술〉을 펴냈다. 만해문예대상·공초문학상·유심작품상·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명사의 업경대 ― 글 방귀희

‘그러지 말껄’
반성과 사과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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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고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본다. 출근 준비를 할 때도 거울은 필수이다. 우리는 거리와 건물 곳곳에 있는 거울로, 가방 속에서 손거울을 꺼내지 않더라도 자기 얼굴을 비춰볼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거울을 보는 이유는 단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싶어서이다. 혹시나 남에게 불결한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행동이 올바른지 나의 행동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면서 주의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자기 몸의 외모는 중요시하면서 자기 몸이 행한 행위에는 관심이 없다. 나부터도 그렇다. 물론 가끔 ‘그러지 말껄’ 하고 후회하기는 해도 곧 잊어버린다. 통렬한 반성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에 제대로 공감하였는가

올해 내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은 가깝게 지내던 후배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이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통화를 하는 사이였다. 항상 그녀가 먼저 전화를 해왔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은 지 2주 정도 지났을 때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여행을 갔나?’ 하면서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해외 출장을 가서도 카톡을 보내는 사람인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디 아파요?’ 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내 문자를 바로 확인했지만 답장을 보내지는 않았다. 나는 확인을 하고도 답장이 없는 그녀에게 서운한 마음이 생겼다. 도대체 카톡 한줄 쓸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쁜 일이 무엇일까? 내가 그녀를 무슨 일로 서운하게 했을까? 지난 통화 내용들을 억지로 되살리며 그녀의 태도가 바뀐 이유를 찾느라고 고통스러웠다. 다음날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선배님! 암이래요. 그것도 3기.”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은 자기한테 닥친 불행을 향해 ‘왜 하필 나인가?’라는 분노심이 생기는데 나나 그녀는 그런 분노가 더 컸다. 우리 둘다 장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둘다 장애라는 문제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거기에 암덩어리까지 생기다니 정말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 했을까요? 절뚝거리고 다니면서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때부터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한테 전화를 자주 했던 이유는 6급 공무원으로 시작하여 18년이 지나도록 진급을 하지 못해 쌓인 속앓이였다. 어느 날은 ‘퇴직을 하겠다고 했다.’가 또 어느 날은 ‘그만 두더라도 진급하고 그만 둔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어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다. 여기에 장애는 사회 생활을 하는데 큰 핸디캡이 된다. 나도 그랬다. 내 실력보다는 나의 장애 때문에 나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밤마다 전화로 설움을 토해내며 서로를 위로하며 살았다.

“요즘은 의학이 발달해서 암은 얼마든지 치료가 된대. 아무 걱정하지 말고 치료에만 집중해. 대학 입시 앞둔 딸을 위해서라도 약한 모습 보이면 안돼. 우리가 장애를 갖고도 몇십 년을 살았는데 암 하나 못 이길까? 이제부터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해.”

나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위로밖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 후 틈틈이 그녀를 떠올리며 문득 허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상생활을 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그 고통을 나눌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슬퍼진다. 인간이 한없이 이기적이고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며 요즘은 그녀가 치료받고 나서 부담 없이 사회활동을 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그녀는 나의 업경대가 되었다. 이제부터는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회향하는 마음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아낌없이 베풀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의 시간을 소중히 보내고 있다.

“너도 늙어봐라!”

요즘 부쩍 돌아가신 지 20년이나 된 엄마 생각을 한다. 맏딸인 내 친구들은 아직도 부모님이 살아계시는데 나는 막내였기 때문에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것처럼 느껴진다. 82살까지 엄마는 막내 딸을 돌보시느라고 외출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셨다. 그 흔한 효도관광 한번 다녀오시지 못하였다.

엄마는 자기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려면 항상 내게 물었다. “그 드라마 몇 번에서 하니?” 그냥 대답해 주면 될 것을 “엄만 어떻게 매주 물어봐.”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때 엄마가 한 말이 ‘너도 늙어봐라.’였다. 나는 그때 콧방귀를 끼었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요즘 드라마 채널을 몰라서 여기저기 돌리면서 찾는다. 그제야 반성한다. ‘아 그래서 엄마가 그랬구나.’

늙는다는 것은 장애보다 더 힘든 일이다. 장애는 내 의지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되지만 65세가 되는 순간 말이 어르신이지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하루아침에 강사 자리도 다 끊기고 장애인활동지원 서비스도 노인요양보호 서비스로 넘어가서 돌봄서비스 시간이 반으로 줄어든다. 노화는 서서히 일어나는 것인데 65세를 기점으로 삶이 확 바뀌게 되니 어이가 없었다. 예전에 퇴직할 즈음 ‘나, 뭘 하고 살지?’라고 걱정하는 직장 선배들을 보면서 뭘 저렇게 안간힘을 쓰나 싶어서 ‘이제 좀 쉬세요. 여행도 다니시구요.’라고 위로했었건만 막상 내가 그 시기에 이르자 그 말이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지 가슴이 아려온다.

사람은 왜 본인이 경험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늙어봐야 아는 것을 젊었을 때 이해한다면 적어도 세대간의 갈등은 생기지 않을텐데 싶어서 안타깝다.

내로남불을 치유하려면

‘내로남불’을 마치 사자성어처럼 사용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내로남불 현상은 업경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자기가 예전에 했던 말인데 입장이 바뀌었다고 그 말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신뢰를 잃는 행동이 된다. TV 뉴스를 보면 정치인들은 하나 같이 내로남불이다. 기억력이 없는 것인지 뻔뻔한 것인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회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내로남불을 치유하려면 ‘자기가 비난했던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자기 서약이 필요하다. 요즘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모든 것이 영상이나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자기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할 수가 없다. 속담에도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있듯이 자기 자신이 깨끗하지 않고 남의 잘못을 탓하면 그 사람의 말은 힘을 잃게 된다.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반성하고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고맙다는 인사보다 더 필요한 것은 죄송하다는 사과이다. 우리는 ‘미안하다’, ‘잘못했다’, ‘죄송하다’는 말에 왜 이토록 인색한지 모르겠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그때 그 일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미안하다.”라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반성과 사과가 없는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병들고 있다.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업경대를 늘 마음속에 품고 그때그때 반성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면 즉시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을 가장 멋있게 만든다. 거울을 꺼내 들고 외모를 가꿀 것이 아니라 업경대를 수시로 봐야 사람들에게 신뢰받고 존경받는 정말 인간다운 사람이 될 것이다.

나도 반성한다. 왜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왜 65세 노인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는 내로남불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타인의 아픔에 제대로 공감했을까? 암에 걸린 후배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내 인생에 부끄러움은 정말 없는 것일까? 나는 적어도 앞으로는 반성하며 사과를 주저하지 않겠다는 자기 서약을 한다.

방귀희
〈솟대평론〉 발행인. 동국대 불교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문학석사, 숭실대에서 사회복지 박사학위를 받았다. 숭실사이버대학교 방송문예창작학과 특임교수, 숭실대학교 사회복지복지대학원 겸임교수. 지체장애(1급)를 앓고 있으며, 현재 사단법인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대표를 맡고 있다. 국민훈장 석류장 · 한국방송작가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명사의 업경대 ― 글 윤용진

환갑에 다시
시작하는 걸음마

ⓒGettyimagesBank

어떤 스님이 열심히 지장기도를 하던 중에 업경대를 봤다고 한다. 하늘에서 갑자기 기차 레일 같은 것이 땅으로 내려오더니 그 레일을 타고 검정색 리무진이 스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리무진에서 검정색 양복에 중절모를 쓴 노신사가 대형 거울을 가지고 내렸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 한 바퀴를 돌고 와서는 그 거울을 스님에게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스님, 이 거울에는 스님뿐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빠짐없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스님은 그 노신사의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고 한다. 그 꿈이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던 모양이다.

마음속 업경대의 역할

2023년 계묘년(癸卯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매년 연말이 되면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데, 올 한해는 내게 좀 특별한 해였다. 왜냐하면 바로 60년 전 올해와 똑같은 계묘년에 내가 이 세상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수명이 길어져 환갑은커녕 칠순 잔치도 하지 않는 터라 별 이벤트는 없었다. 그저 여느 주말처럼 가족과 함께 집 근처 중식당을 찾았다. 다만 환갑이란 명칭만으로도 지난 세월을 되돌아볼 충분한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좋은 기억보다 아쉬웠던 기억, 창피스러웠던 기억 등 후회스러운 기억들이 더 선명하게 다가와 나를 자꾸 괴롭힌다. ‘그때 좀 더 잘할걸’, ‘그때 좀 더 베풀걸’, ‘그때 좀 더 참을걸’ …….

남자가 나이가 들면 점점 중성화되어 눈물도 많아지고 소심해진다고 하는데, 예전 같으면 “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냐!”하고 넘길 수 있을 일들마저 밀려오는 후회스러움에 밤잠까지 설치게 했다.

사람이 죽으면 염라대왕 앞에 불려 나가 자신이 생전에 지은 죄업을 업경대를 통해 보게 된다는데, 그 예행연습이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오래된 거울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데, 그 거울이 60년 만에 오랜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불교 공부에 흥미가 많다. 그중에서도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이며, 만법(萬法)은 오직 식(識)이다.”라는 유식사상에 관심이 높다. 그래서 이참에 ‘마음 치유’를 위해 유식사상을 다시 들여다보기로 했다.

우선 유식불교의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여섯 가지 감각적 기관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우리에게 번뇌가 생기는 이유도 이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는 여섯 가지 인식 대상과 부딪히기 때문이다. 참고로 ‘6×6=36’에 과거·현재·미래의 3을 곱하면 108번뇌가 된다. 이 여섯 기관 중 앞의 다섯을 전 5식(前五識)이라 하고,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을 6식이라고 구분하는데, 우리는 흔히 이 6식을 ‘마음’이라고 부른다.

이 마음은 다시 셋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가 의식(意識), 둘째가 제7식인 마나식(末那識), 셋째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분석 심리학적 구분법에 따르면 제6식은 의식의 세계이며, 제7식과 제8식은 무의식의 세계에 비견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근원적인 마음인 아뢰야식은 앞에서 말한 모든 식의 행위와 육체적인 행위, 다시 말해 그것이 선행이든 악행이든 간에 가리지 않고 전부를 보존한다.

설명이 길었지만, 유식사상에 의하면 결국 업경대는 우리 각자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업경대의 활동에 의해 우리는 과거의 잘못에 대해 계속 고통받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과거의 잘못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할까?”

과거 잘못 거울삼아야

이런 의문이 깊어지던 어느 날, 길어진 머리를 다듬기 위해 자주 가는 미장원에 들렀다. 내 차례를 기다리던 중에 우연히 책꽂이에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황수관 박사의 〈신바람 인생〉이란 책이었다. 그리고 그 책을 뒤적이다가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했다.

“사마천(司馬遷, B.C. 145?~B.C.91?)은 친구를 변호하다가 남자의 기능을 거세당하는 형벌까지 받았지만 그로 인해 〈사기(史記)〉를 저술함으로써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칭송된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 1469~1527)는 정변에 휩쓸려 산트 안드레아의 한 농장에 평생 갇혀 지내는 종신 연금형을 받고 그 기간에 〈군주론〉을 집필하게 되었다.”

이런 내용이었다. 셰익스피어가 “가장 훌륭한 사람조차 ‘결점(Fault)’으로 주조 된다.”고 말했던가? 최근 발매돼 인기를 끌고 있는 책 〈일론 머스크〉에서도 볼 수 있듯, 아버지의 학대와 친구들로부터의 따돌림, 부모의 이혼 등에도 불구하고 머스크는 오히려 그 어둡고 힘든 과거를 극복하며 느끼는 쾌감을 성공의 동력으로 삼았다.

물론 모든 번뇌가 극복되고 성공의 밑거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결점은 비극을 낳고, 어떤 결점은 극복되어 성공을 낳는다.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도 ‘콤플렉스(Complex)’가 사람을 우울증과 자살로 몰아넣을 수 있지만, 이를 잘 극복하면 소중한 성공의 열쇠가 된다고 말했다. 오히려 콤플렉스가 적은 사람은 재미없고 따분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 언제까지 과거만 돌아보며 후회만 하고 있을 것인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것을 거울삼아 다시 앞으로 나가라.’는 게 업경대의 역할이자 존재 이유는 아닐까?

요즘은 의학이 발달해서 재수가 없으면 120세까지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한술 더 떠서 노화를 거슬러 세포를 젊어지게 하는 물질까지 개발되고 있다고 하니, 어쩌면 영영 죽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아야 할지도 모른다.

오래전 개그 프로그램에서 “우리 동네에선 그저 ‘500살은 먹어야 이것이 좀 철이 들었구나.’한다.”던 말이 떠오른다. 이에 비하면 인생에서 환갑이란 나이는 이제 막 엄마 젖을 뗀 단계에 불과하다. 그만큼 돌아봤으면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과거의 잘못을 거울삼아 새로운 60년을 향해 앞으로 다시 한 걸음, 걸음마를 시작해 봐야겠다.

윤용진
영화감독. 인하대학교와 도쿄디자인전문학교를 졸업했다. CF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010년 영화 ‘할’로 데뷔했다. 영화 ‘선종 무문관’으로 제25회 불교언론문화상 특별상과 제52회 휴스턴 국제영화제 종교부문 금상을 수상했다. 2021년에는 ‘칼 융이 보내온 편지’로 토론토 필름매거진 최우수 단편다큐멘터리 부문 대상을 수상하는 등 4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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