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사리구시 용도
밥·설거지 뿐 아니라
한지 만드는데도 사용돼

대중이 많은 큰절 살림살이는 후원의 식생활 용기에서부터 실감이 난다. 통일신라기에 조성되어 보물로 지정된 법주사 철확(鐵鑊)은 지름 2.7m에 높이 1.2m의 거대한 크기로, 대중이 많이 모일 때 수천 명 분의 밥과 국을 끓였다는 가마솥이다.  

그뿐 아니라 대찰에는 큰 행사 때 대중의 밥을 담는 용도로 썼다는 대형 목기(木器) ‘비사리구시’가 전한다. ‘구시’는 ‘구유’의 옛말로 통나무나 돌의 속을 파서 만드는 대형그릇을 말하고, ‘비사리’는 느티나무를 뜻한다. 느티나무는 목재가 치밀하고 결이 아름다워 사리함을 만들 때 즐겨 쓰인 수종으로, 사리함을 만든 나무라 하여 ‘사리나무’라 부른 데서 ‘비사리’라는 말이 생겨났다. 

현재 범어사·보경사·석남사·송광사·옥천사·통도사 등 규모 있는 여러 사찰에 남아있다. 이들 비사리구시는 대개 조선 후기에 만든 것으로 길이가 몇 미터에 달하는 크기이다. 송광사와 보경사 등의 것은 쌀 일곱 가마에 해당하는 4,000명 분의 밥을 담을 수 있는 크기이며, 나라의 제사를 지낼 때 대중이 공양할 밥을 담아두었다. 

범어사의 경우 행사 후 식기를 씻는 용도로 사용한 것이라 하여, 비사리구시 이름 아래 ‘식기세척기’라 적혀 있다. 안쪽에 작고 둥근 두 개의 구멍은, 나무 마개를 이용해 물을 담았다가 식기를 씻은 다음 흘려보내는 용도라 보았다. 이처럼 사찰에서는 대중공양을 위해 밥을 퍼 놓거나 식기를 씻기 위한 용도로 만든 통이라 짐작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학계에서는 비사리구시가 조선시대 사찰에서 부역(負役)으로 종이를 만들 때 사용한 지통(紙桶)·지조(紙槽)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조선왕조실록〉에 고을마다 종이 만드는 일을 사찰에 전담케 하고 있음을 알리면서, 종이 부역의 폐단을 기록한 내용이 여러 곳에 나온다. 

한지 전문가인 영담 스님은 닥나무 섬유를 물에 풀고 표백할 때 쓰던 용도라 보았다. 삶은 닥나무 내피를 찧어 물이 담긴 지통에 넣고 잘 풀어지도록 휘저은 다음, 닥풀을 넣고 고루 섞어서 종이를 뜨게 한다. 현재 비사리구시가 남아있는 사찰도 대개 닥나무가 잘 자라는 영호남 지역이며, 산중사찰은 깨끗하고 풍부한 물을 구하기 쉬워 종이를 많이 만들었다. 

‘비사리’가 느티나무를 뜻하고 ‘구시’가 대형용기를 일컬으니, ‘비사리구시’라는 말은 그대로 써도 문제가 없을 듯하다. 다만 그 용도가 밥을 담거나 설거지를 하는 용도의 후원문화와 관련된 유물이 아니라, 한지를 만드는 제지·공예문화, 사원경제와 관련된 것으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근래 송광사에서는 ‘여러 사찰에 비슷한 용도의 구시가 있어 종이를 만드는 지통으로 사용했으나, 송광사의 경우 몇 가지 근거에 따라 지통이 아니라 밥통으로 본다.’고 다시 밝혔다. 통 속에 물을 담아서 무언가를 하고 버릴 용도라면 물을 빼낼 구멍이 필수적인데, 송광사 비사리구시는 훼손으로 바닥 전체가 뚫려 확인이 어렵다. 이에 비해 범어사·통도사 등 다른 사찰의 것은 구멍이 남아있어 이에 대한 앞으로의 연구를 기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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