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삶 지혜 지닌 책
한국철학작품 번역하려면
먼저 탄탄한 한글 번역 필요

고전은 ‘옛날의 책’이다. 동시에 삶의 지혜를 지닌 ‘오늘의 책’이자 ‘내일의 책’이다. 고전을 읽는 일은 지혜를 얻는 과정이다. 그런데 고전의 언어는 지금의 언어와 다르다. 이 때문에 번역자는 ‘반역’을 무릅쓰고 ‘번역’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대개 번역은 문자 그대로 번역하는 직역, 의미 중심으로 번역하는 의역, 그리고 해석학적 번역으로 구분한다. 해석학적 번역은 해당 ‘기호가 채택되는 철학적 의미맥락을 성찰하고, 선택한 의미를 반영하는 번역어를 채택해야 한다.’(박태원) 

이런 정의에 의한다면 해석학적 번역은 ‘완전 번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번역은 ‘모든 한자의 의미 풀어쓰기’와 더불어 ‘문장 의미에 대한 번역자의 이해를 번역문에 명확하게 반영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박태원) 고전 번역을 통해 원작자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고 그 뜻의 의미가 독자와 소통된다면 번역자의 역할은 다하게 된다. 하지만 고전 번역에서는 의미의 증폭이 적지 않기에 직역·의역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서 해석학적 번역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파악한 뜻을 부연하여 설명하고 단어와 문장들의 관계를 정밀하게 연결시켜 주는 보조문의 삽입이 필수적이다. 원문에는 없어도 의미 전달에 필요한 내용을 원문과 차별 가능한 형태로 적절하게 추가해야 한다.’(박태원) 이렇게 되면 의미 전달은 유용하지만 문장이 길어지고 삽입된 보조문을 표시하는 ‘대괄호([])’로 인해 가독성이 떨어진다.   원효(617~686) 철학의 핵심어인 ‘중도일심’에서 중도(中道)를 ‘모든 존재자의 치우침이 없는 본래마음’(고영섭)으로, 일심(一心)을 ‘하나처럼 통하는/통하게 하는 마음’(박태원)으로 풀면 단어는 길어지고 의미는 분명해진다. 문제는 ‘본래[中]’와 ‘하나처럼 통하는/통하게 하는[一]’ 이라는 풀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다. 중도의 ‘중’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로 푼 것이고, 일심의 ‘일’도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로 푼 것이다.

중도에서 ‘치우침이 없다[中]’란 유무(有無), 비유비무(非有非無), 비진비속(非眞非俗), 공불공(空不空) 등의 어느 한쪽의 극단이 없음을, 일심에서 ‘하나로 통하는[一]’은 둘이나 그 이상의 갈래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중’과 ‘일’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성철(1912~1993) 철학의 핵심어인 ‘중도무심’에서 ‘무심(無心)’은 가무심(假無心)과 진무심(眞無心) 중 진무심인 구경무심(究竟無心)을 일컫기에 ‘무(無)’ 또한 ‘중’과 ‘일’에 상응하는 ‘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붓다의 ‘중(中)’, 원효의 ‘일(一)’, 성철의 ‘무(無)’는 상통하는 개념이다.

K-팝·K-컬처 등에 이어 K-클래식(문사철)이 한류의 최종판이 되고 있다. 한국문학 작품이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로 번역되어 국제문학상을 받고 있다. 한국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외국어 번역본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철학 작품이 영어 등의 외국어로 번역되려면 원전과 함께 탄탄한 한글 번역이 요청된다. 먼저 어떤 작품의 어떤 번역본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힐 수 있을까 되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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