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8호

인과와 인연의 흐름을 바르게 살펴라다시 가을입니다. 쉼 없는 계절의 흐름을 따라 천지는 가을빛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일이 인과의 흐름이니 이 가을 또한 어떤 원인의 결과일 것입니다. 결과일 뿐 아니라 또 새로운 원인의 시작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 가을에 먹게 되는 사과 하나는 그냥 한 개의 사과가 아니라 봄에서 여름을 거쳐 온 무수한 시간의 농축이라 했습니다. 사과 한 개에 농축된 시간은 어쩌면 금년만의 봄과 여름이 아니라 억겁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사람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금생에 사람 몸을 받고 와서 한평생을 살아가는 이것이 어찌 한 생만의 일이겠습니까? 무수한 생을 거듭하여 지은 인연을 따라왔고 또 앞으로 무수한 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이 24시간이 오늘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무상한 흐름을 따라가는 것과 계절의 흐름과 이생의 흐름이 다 한통속의 일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시간의 흐름을 잘 관찰해야 하고,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과 사물과 일들의 인연 관계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인과와 인연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인과는 원인에 따르는 결과라는 단순한 이치인데 그것을 바르게 알고 믿으면 됩니다. 이런 일을 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를 생각하여 예측하는 지혜가 인과를 삶에 응용하는 기본자세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연이라는 것은 인과의 작용에 따르는 다양한 변수를 포함합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는 기정사실은 인과이지만 콩을 어디에 얼마나 누가 심느냐, 어떻게 관리를 하느냐,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 맺는 동안에는 어떤 관리가 필요하느냐, 콩을 얼마나 수확했느냐 등 다양하고 다각적인 작용들이 따릅니다. 그것이 인과의 총체적인 흐름, 인연입니다.

불교는 인과를 알고 인연을 잘 제어하는 지혜를 가르칩니다. 그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의 장광설이고 ‘언어도단’의 자리에서 ‘직지인심’을 획득하여 ‘견성성불’ 하는 선(禪) 수행의 요지입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인과를 알고 믿습니다. 누구나 어김없는 연기적 질서 속에서 선업을 짓고 복덕을 쌓고자 합니다. 그래서 불자의 눈에도 인과가 보이고 인연의 작용이 보입니다. 

삼계유여급정륜(三界猶如汲井輪)  
백천만겁역미진(百千萬劫歷微塵)
차신불향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

무수하게 듣는 이 게송의 깊은 뜻만 바르게 참구해도 인과를 알고 인연을 깨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명 번뇌에 얽혀서는 우물 안을 오르내리는 두레박처럼 살아갑니다. 무수히 반복되는 두레박의 오르내림이 육도를 윤회하는 무명의 중생이 겪는 고통입니다. 그 기나긴 중생고는 백천만겁이라는 시간으로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의 몸을 받아서 첨단 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인과를 알 수 있는 지능이 충분하고, 우주의 연기적 질서를 배우고 깨우치기에 충분한 교육과 수행 시스템이 있는 이 좋은 시절을 살고 있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삼업을 청정하게 닦고 육근을 청정하게 다스리는 지혜가 책마다 들어 있고, 보리심을 촉발시켜 주는 법문과 보살도를 안내하는 바른 선지식이 무한하게 존재하는데 무엇 때문에 중생고를 염려하겠습니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누구나 지혜롭게 사용하면 됩니다. 조주선사가 “시간에 끌려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시간을 끌고 가는 삶을 살라.”고 촉구했듯이,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무한히 펼쳐진 진리를 흡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두레박처럼 우물을 오르내리는 중생고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가을 산의 나무들은 탈속(脫俗)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가을의 나무들이 무성하던 잎들을 모두 떨구어 버리고 앙상한 몸으로 겨울에 맞서는 의연함을 배워야 합니다. 물기를 버리지 않으면 혹한의 바람에 얼어버릴 것을 미리 알기에 저렇게 잎을 떨구고, 그 잎을 다시 뿌리로 받아들여 스스로 영양을 공급합니다. 말없이 이루어지는 가을 숲의 인과와 인연이 인생의 피곤한 망념들을 돌이켜 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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