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거룩한 깨달음
중생에게 회향하는
원력 세워야

한국을 정신적으로 이끄는 3대 종교는 불교·개신교·천주교다. 세 종교는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이른바 세계 종교이다. 유럽은 가톨릭이 주류였고, 미국은 개신교가 우월하다. 불교의 영역은 동남아시아와 한국·일본·중국 등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기독교의 세력이 한국전쟁 이후 급격한 발전을 이뤘다. 전통적인 기독교세가 몰락해가는 서양에서는 그 비결이 무엇인가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아직 완벽한 결론을 이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한국의 기독교가 사회복지 측면에서 성공적인 선교를 이뤘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불교도 최근에는 사회복지에 눈길을 돌리는 추세이지만 기독교의 아성을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다.

한국불교가 중생을 위한 복지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점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런데 그 결실이 더딘 점은 불교가 가진 본질적 문제 때문이다. 석가모니부처님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수행을 이상으로 삼아왔다. 장로불교(Theravada Buddhism)에서는 아라한이 되려는 노력, 대승불교권에서는 성불이라는 이상을 실천하려는 것이 불교의 목표였다. 어느 누구도 사회복지활동을 하려고 출가하지는 않는다. 불교는 그 수행원력으로 존재의 의미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를 에워싼 주변 환경은 더 이상 불교를 수행에만 몰두할 수 없는 환경으로 바꾸었다. 한국의 불교·개신교·천주교는 끊임없이 선의의 각축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자 한다. 그런데 무종교인들이 종교를 선택하는 기준은 결코 진리에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종교를 바라보는 가장 보편적 시각은 과연 어떤 종교가 우리 사회에 더 유익하냐.’를 보는 현실적 인식이며 종교지도자들의 사회적 헌신이 얼마만큼 영향력을 갖느냐.’를 따지는 실용적 관점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불교는 언제나 손해를 보고 있으며 아예 불교는 그런 문제보다는 자기수행에만 집착하는 종교로 오인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불교의 거룩한 깨달음을 고통받는 중생에게 회향하려는 원력을 세울 때가 되었다.

기독교가 이 땅에서 이룩한 선교사업은 병원 건립, 대학 등의 교육기관, 고아원, 양로원 등을 통한 선교전략이었다. 대한민국의 유수한 종립대학은 거의 기독교가 선점하고 있으며, 240개의 4년제 종합대학 가운데 불교종립대학은 동국대·금강대·위덕대가 전부이다. 나는 감히 제안한다. 조계종의 본사, 천태종의 대도시 사찰 등은 의무적으로 초··고등학교나 어린이집 등을 운영해야 하리라는 점이다. 법회의 질적(質的) 개선도 시급히 서둘러야 한다. 법문이나 기도 위주의 법회보다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해나가야 한다. 조계종·천태종·진각종·태고종 등 유수한 불교종단이 의무적으로 복지재단을 운영하도록 종법을 개정해야 한다.

인도불교·중국불교가 허망하게 무너졌던 역사적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도와 중국의 양대 세력들에서 또다시 불교 붐이 일어나는 것은 진리적 이유 때문이 아니다. 적극적인 사회봉사가 이들 두 나라 국민들을 감동시켰고 그 결과 두 나라는 또다시 불교국가가 될 수 있는 터전을 이루고 있다.

중생 개개인에게 이로운 종교, 국가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되는 종교가 되려는 노력이 바로 미래종교의 핵심적 과제로 등장한다는 점을 모든 불자들은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불교가 사회를 위해 있어야지 사회가 불교를 위해 있어서는 안되지 않은가.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