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벌써 마감하는 시점에 왔습니다. 새해가 멀지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월이라는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달력을 만들어서 역법에 따라 새해의 시작과 한해의 마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해를 마감하는 시점에서는 지난 한해를 되새겨보면서 잘못되거나 불행했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재연되지 않기를 바라며 새해에는 좋은 일만 생기고 나쁜 일은 없기를 마음으로 기원하게 됩니다. 송구영신의 마음을 담아 새해 인사를 나누고 축하의 말을 전하는 것도 그런 뜻이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불교의 근본 도리로 보면 지난해와 새해가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윤회전생(輪廻轉生)은 말씀하셨지만 새해나 지난해를 구태여 따지지는 않으신 것 같습니다.
수레바퀴가 돌아 끊임이 없듯이 중생이 잘못된 집착이나 그릇된 견해 혹은 번뇌나 업으로 인해 삼계육도(三界六道)에 따라 죽어서 다시 나고 또 다시 죽고하면서 생사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중시하셨을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종교에는 자기들의 역법이 있는데 불교에는 특별한 역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역법은 서력기원으로 세계인이 사용하는 역법이 되었지만 이슬람도 자기들의 역법이 있어서 라마단이니 하는 금식월을 철저히 지키고 유대인들도 그들 나름의 유대역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불교의 경우는 불기가 있어도 불교의 역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인들은 이들 종교보다 오래된 종교이면서도 자신의 역법을 만들지 않고 남의 역법을 부정하지 않고 이를 이용해 세월의 흐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동양에서 일찍부터 사용하던 음력을 이용하여 불교의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근년에는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서력을 그대로 받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불교가 융통성있고 포용적인 것은 결코 무능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그런 것보다 죽음의 문제라든가 윤회의 문제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중요하게 거론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죽음입니다. ‘아! 덧없구나. 사람의 목숨이여. 백세에 이르지 못하고 사람은 죽는다. 혹 그보다 오래 사는 사람이 있어도 역시 그는 늙기 때문에 죽는다'고 《숫다니파타》에는 나와 있습니다. 생로병사에 대한 부처님의 기본적인 인식을 느끼게 되는 대목입니다. 사실 평범한 사람이라도 이 점의 절실성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은 것의 절대성에 눈을 감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께 그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듣고자 하고 깨침을 얻어 고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에서 “탐애에서 탐애가 생기고, 탐애에서 미움이 생기며, 미움에서 탐애가 생기고, 미움에서 미움이 생긴다”고 하시고 《원각경》에서는 “일체중생이 무시이래로 종종 오인하여 사대(四大·地水火風)를 망령되이 인증하여 제 몸의 형상을 삼고… 병든 눈으로 망녕되이 집착하므로 생사 윤회하는 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무명과 탐애를 깨달아 이를 벗어나야 생사고해를 건넌다는 말씀이겠지요.

모든 중생은 삼계육도에 윤회한다고 합니다. 모든 중생은 세가지 세계 곧 탐욕의 세계인 욕계, 색욕의 세계인 색계, 정신의 세계인 무색계로 윤회합니다.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천의 육도 윤회도 합니다. 이것이 어찌 나고 죽은 것으로 구별이 있겠습니까. 현실에도 육도는 있고 삼계도 있겠지요.

하루에도 몇 번씩 육도를 윤회하고 삼계를 전전할 수도 있겠지요. 무명에 덮인 우리의 마음을 정견할 수 있다면 탐·진·치의 삼독을 제어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겠지요.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가 생각해야하는 것은 결국 삼계육도를 수시로 윤회 전전하는 고통을 벗어나려는 우리의 바른 마음자리를 찾는 일이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른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단히 수행 정진하는 삶을 실천하도록 우리 함께 다짐하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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