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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용의 ‘이야기 〈유마경〉’6_문수사리문질품병의 원인 묻는 질문에
중생의 병을 자신의 병 삼는
보살의 큰마음 드러내
  • 글 성태용·삽화 전병준
  • 승인 2021.10.2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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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힐경변도(維摩詰經變圖)가 새겨진 비석의 일부.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문수사리보살 문병을 가다

• 무대 - 인도 바이샬리 성

• 주요 등장인물 – 부처님, 유마거사, 문수사리보살.

• 주요 전개과정

제자와 보살들이 모두 문병사절을 감당할 수 없다고 물러서자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보살에게 문병사절을 부촉하신다. 문수보살은 겸손한 자세로 이에 응하여 유마거사의 문병을 하러 떠난다. 모든 스님과 천신, 보살들이 거룩한 법의 자리라는 것을 알고 따라나선다.

유마거사는 방을 텅 비워놓고 문수사리보살 일행을 맞는다. 문수보살이 병문안을 하면서 병의 원인을 묻자 유마거사는 “중생이 병들었기에 보살이 병든다.”라는 대답을 하면서, 보살도의 실천을 통해 병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펼쳐낸다.

큰일이 났네요.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던 십대제자와 보살들이 모두 문병사절을 감당치 못하겠다니. ‘부처님 문하에 사람 없다.’는 소문이 퍼지게 생겼지 않았어요?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요. 지금 우리가 읽어나가고 있는 〈유마경〉은 유마거사를 높이 치켜세우면서, 그의 입을 통해 대승을 설파하기 위한 무대입니다. 지금 십대제자와 여러 보살들은 그 무대의 연출에 맞춰 유마거사를 높여주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위상을 높여놓으면, 그분의 입을 통해 나오는 가르침이 더더욱 빛나게 되겠지요. 물론 유마거사가 그만큼 훌륭하니까 그렇게 높일 수가 있을 것이지만요.

그리하여 돌고 돌아, 결국 문수사리보살에게 임무가 주어집니다. 문수보살은 어떤 보살님이죠? 우리 불자들이 예불을 할 때 늘 문수보살을 찬탄하는 말을 히지 않습니까?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이라고요. ‘큰 지혜를 갖추신 보살’이라는 의미지요. 그렇습니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상징입니다. 〈법화경〉 등에서는 ‘법왕자(法王子)’라고 불리고 있기도 하지요. 보살님들은 각각 특징이 있는데 문수보살님은 지적인 측면에서, 법에 대한 이해의 측면에서 가장 탁월한 분으로 찬탄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문수보살에게 부처님의 부촉이 돌아갑니다.

병문안 핑계 삼은 법담

문수보살의 응대를 보면 참으로 의젓하고도 품위가 있어서 찬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선 유마거사는 참으로 법(法)으로 상대하기 힘든 분이라고 말하면서, 이 경전의 설정에 맞추어 유마거사를 높입니다. 그러고 나서 슬그머니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 그를 찾아뵙고 문병하겠습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부처님의 위신력을 높이는 모습에 겸손함과 당당함이 빛나게 드러납니다.

아무튼 그래서 문수보살이 문병사절로 나서자 모든 제자와 천신들이 모두 따라나섭니다.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의 만남이 진리를 접할 수 있는 천고에 드문 자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이런 자리를 놓치면 몇 겁을 땅을 치며 후회할 자리라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몇 만 명이 구름처럼 유마거사의 처소로 달려가지요. 정말 ‘운집(雲集)’이라는 말뜻그대로 구름처럼, 이렇게 찾아오는 것을 알고 유마거사는 그분들을 맞는 시작부터 오묘한 장치를 만듭니다. 신통력으로 시중드는 이도, 모든 세간살이도 하나 없이, 방을 온통 텅 비운 채 홀로 병을 앓고 누워있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여기서부터 느끼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홀로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비어있음은 두 측면이 있습니다. 뒤에 유마거사는 이 불국토 자체가 비어있음[空]을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필자는 우리 모두 아무것도 없는 속에 홀로 앓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강하게 느낍니다. 공허의 바다 위에 떠있는 존재, 결국 우리는 혼자인 존재이지요. 누구도 나의 아픔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확실히 봐야 하지요. 그렇게 공허를 똑바로 마주하고, 그러면서도 그 공허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유마거사가 보이신 것과 같은 비어있음[空]의 진리에 도달하게 되겠지요. 필자는 좀 감상적인지, 홀로 빈방에 앓아누우신 유마거사의 모습에서 무언가 우리 삶의 본질을 본 것만 같아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젖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자, 그렇게 무대를 꾸며놓고 있는 유마거사의 방에 문수보살을 비롯한 대중들이 들이닥칩니다. 그리고 정말 심오한 법담(法談)이 오가게 됩니다. 그 심오한 법담을 심오하게 풀면 너무 심오함이 겹칠 것 같아서 슬쩍 양념을 쳐가면서 가볍게 풀어 보겠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 오는 것을 보자마자 유마거사가 화살 하나를 쏘아 보냅니다.

“잘 오셨습니다. 오는 바 없이 오시고, 보는 바 없이 보시고, 듣는 바 없이 들으십니까?”

‘흠, 처음부터 분위기를 좀 잡아봐야지?’하는 느낌이 듭니다. 〈반야심경〉의 구절이 떠오르네요.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진여(眞如)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생멸과 변화는 덧없는 것입니다. 유마거사는 아주 무서운 화살을 날린 것이지요.

“당신은 그 진여를 떠나지 않고, 이 생멸의 세계를 노닐고 계시겠지요?”

문수보살님, 역시 백전노장입니다. 처~억 받아냅니다. 마치 ‘어허, 이 어른 참으로 마음이 급하시군요. 숨 좀 돌리고 하십시다.’하는 기분일까요? 일단 유마거사의 말에 긍정을 하면서도 ‘이 문제는 이 정도로 하지요.’하면서 슬쩍 물러섭니다. ‘부처님의 심부름으로 왔으니, 문병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하며 눙치는 모습이지요. 그러면서 평범한 문병의 말로 유마거사를 슬쩍 떠봅니다.

“이 병은 왜 생겼나요? 생긴 지 오래 되었나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유마거사가 방편으로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아는 문수보살이 육체의 병을 물었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육체의 병은 불보살의 눈으로 보면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그것을 병으로 여길 까닭도 없습니다. 병을 묻는 의례적인 말이라고 의례적인 말로 답하면, 이 법의 자리는 그걸로 끝나는 것입니다. 문수보살께서 평범함 속에 비수처럼 날카로운 물음을 숨겨서 건넸습니다. 유마거사도 척 알아챕니다. ‘흐흠, 멍석을 펴주니 한판 멋지게 놀아보란 말씀이지요?’ 평범한 문병의 말에 터지는 유마거사의 사자후를 보면 이런 느낌입니다. 천년을 울려 퍼질 명언, 〈유마경〉 전체를 통해 가장 잘 알려진 유명한 대답이 여기서 나옵니다.

“중생이 병들기에 보살도 병든다”

“중생이 병들기에 보살도 병든다.” 쉽게 말하면 “중생이 아프기에 보살이 아프다.”입니다. 유명한 말이라 다 잘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참 어려운 말입니다. 중생이 아프다고 왜 보살이 아플까요? 중생은 중생이고 보살은 보살인데 말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을 잘 알고 계신 분도 있을 것 같네요. 바로 보살의 자비심 때문에 그런 것이다. 〈유마경〉에 나오는 답도 그렇습니다.

“병이 무슨 원인으로 생겼냐고요? 보살의 병은 대비심(大悲心)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비유합니다. “자식이 병들면 부모도 병든다.”, “보살은 모든 중생을 외아들처럼 생각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말들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또 여기서 물음표를 붙여봐야 하겠지요? 우리가 자식 사랑하는 것이 바로 대비심이란 말인가? 그런데 우리는 자식 사랑한다고 하면서 참으로 여러 가지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보살의 대비심과 우리의 자식 사랑을 나란히 놓는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은가? 보살의 대비심을 우리의 자식 사랑에 비유하는 것은, 비유에 그친 것일 뿐이고,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닐까?

이런 물음들에 독자님들은 어떻게 답하시렵니까? 보살의 대비심과 우리의 자식 사랑은 전혀 다르다고요? 그렇게 보시면 안 됩니다. 둘로 보는 견해, 이것이야말로 〈유마경〉에서 가장 힘써 물리치려하는 잘못된 생각이니까요. 〈유마경〉의 백미는 ‘둘이 아니라는 가르침’(不二法門)입니다. 그 고상한 불이법문과 우리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요? 그렇게 자꾸 차별하는 것이야말로 둘로 보는 잘못된 견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불필요하게 우리를 낮추지 마세요. 모두 한 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사랑과 보살의 사랑이 근원부터 다른 것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사랑의 마음이 뿌리가 되어 보살의 자비심으로 승화하는 것이지, 우리의 사랑은 잘못된 집착일 뿐이며, 보살의 자비심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계속 반복되는 대승의 이치를 꿰뚫어 보셔야 합니다. “번뇌와 깨달음이 둘이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나요? 상극처럼 보이는 번뇌와 깨달음도 둘이 아니라고 하는데, 우리의 자식 사랑과 보살의 대비심을 반드시 둘로 보아야 할 까닭은 없을 겁니다.

물론 우리 중생의 삶은 분별심에 바탕을 두기에 사랑이 집착이 되어 괴로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은 자비라고 하지 않고 ‘애견(愛見)’이라고 구별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마음을 일으키는 그 원동력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단지 무명(無明)이라는 장애가 있어서 그것이 잘못된 모습으로 드러날 뿐인 것입니다. 즉, 그 자체가 자비심의 뿌리라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연기법을 밝게 알고, 아상(我相)이 줄면 그 원동력이 제대로 펼쳐져 대비심이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얼핏 ‘지혜가 가장 중요한 것이로구나. 지혜만 생기면 바로 집착하는 사랑[愛見]이 대비심으로 전환되는 것이로구나!’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지적인 것을 우선으로 여기게 될 수 있습니다. 지혜와 자비가 불교의 두 축이라고 하는데, 지혜가 생기면 자비심이 나오는 것이니 지혜를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또 그게 그런 건 아닙니다.

본디 자비심으로 충만한 존재이기에 지혜에 의해 그 자비심이 빛을 발하는 것이니까, 근본은 자비심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사랑의 마음이 전혀 없으면 수행도 불가능하고 깨달음도 이룰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지요. 우리가 깨달음을 향해 나가는 원동력이 바로 사랑의 마음, 자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깨달음을 통해 이룩되는 참 생명의 완성은 자비심에 충만한 존재이고요. 깨달음을 통해 바위나 고목처럼 감정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자비심에 충만한 존재로 온전한 생명을 실현해나가는 수행자를 바로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본디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러한 것이었고, 또 이래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승이라 불리는 불교에서는 좀 차가운 이상(理想)이 등장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라한’이라는 이상, 다시 태어나지 않는 존재라는 이상은 아무래도 좀 차갑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 중생을 위해 부처가 되는 것까지도 미룬다는 보살의 이상은 또 얼마나 따뜻하고 감동적입니까? 〈유마경〉은 그런 보살이라는 새로운 이상을 형성시켜가는 대승운동의 초기에 이룩된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생이 병들었기에 보살이 병든다.”라는 〈유마경〉의 활발발한 이야기가 바로 보살의 모습을 형성하는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마경〉에서 말하는 보살은 문수보살·관세음보살·지장보살 등의 보살님처럼 부처되기 직전의 경지에 오른 분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합니다. 장자의 아들 보적처럼, 대승의 정신에 뜻을 낸 그런 분들을 보살이라고 부른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든 보살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가?”, “병든 보살은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하는 〈유마경〉의 물음이 좀 어색해집니다. 앞에서 예를 든 그런 보살님들께 던지는 물음으로는 뭔가 이상하니까요. 그러니까 대승에 뜻을 둔 이들이 병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되고 또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볼까요? 우선 보살은 자신의 자잘한 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는 큰 자비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금강경〉에서 모든 중생을 건지겠다는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중생의 병을 아파하는 그 마음이 바로 병을 대하는 보살의 첫 번째 자세입니다. 그리고 병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기도 하고요.

그런 다음에 병을 일으키는 원인을 연기적으로 잘 관찰하며, 병을 앓는 자신조차도 비어 있다는 사실을 투철하게 보아야 합니다. 내 한 몸의 병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고 모든 중생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하는 대비심에서 나온 병이기에, 병을 대하고 극복하는 방법도 바로 모든 중생이 괴로움에 빠져있는 근본 원인을 성찰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을 근본으로 합니다. 유마거사는 그것을 지혜와 방편이라는 말로 압축해서 설명하고 있지요.

지혜로 병의 원인과 현상을 올바르게 보고, 방편을 통해 그것을 원만하게 해결해 나가며, 중생의 모든 병들을 낫게 하는 보살행을 일으킵니다. 올바른 지혜와 올바른 방편,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보살은 스스로의 속박을 풀어 해탈을 이룹니다. 그리고 자신의 해탈을 통해 중생의 속박을 풀어줍니다. 이렇게 지혜와 방편을 조화롭게 추구해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보살행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병에 올바로 대처하고 극복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병을 방편으로 하여 대승의 가르침을 선양하겠다는 유마거사의 뜻, 여기서 이미 반은 이루었습니다. 중생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는 대비심이 근본이지요. 자신의 병에 매달리면 자신의 병도 못 고칩니다. 중생의 병을 자신의 병으로 삼는 보살의 큰마음이라야, 거기에서 지혜가 나오고, 방편도 나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병과 중생의 병을 함께 낫게 하는 보살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태용
전 건국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한학자 양성 장학생’으로 선발돼 故임창순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다. EBS에서 ‘주역과 21세기’라는 제목으로 강의했으며, 한국철학회 회장과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주역과 21세기〉·〈어른의 서유기〉 등이 있다. 

글 성태용·삽화 전병준  ggbn@ggbn.co.kr

행복을 일구는 도량, 격월간 금강(金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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