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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우주에서 붓다를 만나다293호

[특집] ➊ 연기법과 현대 우주론 ― 글 김성구

평행우주는 영원히 존재하는
〈법화경〉의 우주관 연상시켜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

종교와 과학은 그 영역과 목적 및 진리의 탐구방법이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종교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를 상호비교하고 해석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종교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가 다르지 않다고 본 과학자들도 상당수 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은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의 영역에서 오는 참신한 생각들은 모두 깊은 종교적 감정에서 오는 것이며, 그러한 감정 없는 과학적 사고는 결실을 맺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종교와 과학을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했다. 그는 “진리를 찾는 것은 이성적 사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종교적 감정(Religious feeling)이며, 인간의 이성은 이렇게 찾은 진리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종교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는 다를 수 없으며, 미래의 종교는 그 교리가 과학적으로 뒷받침되고 과학자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미래의 종교를 ‘우주적 종교(Cosmic religion)’라고 불렀다. 그는 “우주 종교적 감정(Cosmic religious feeling)이란 인간이 갖는 그릇된 욕망의 허망함을 깨닫고 정신과 물질 양쪽 측면에서 나타나는 질서의 신비와 장엄을 느끼는 것이다. 이 느낌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아인슈타인 자신의 내적체험으로서 그러한 종교적 감정을 느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구약시대의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이 감정을 느끼고 있었고, 특별히 불교는 이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다고 보았다. 불교를 우주적 종교의 강력한 후보 중 하나로 본 것이다.

종교와 과학의 영역이 다르다고 하지만 우주와 자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세상 모든 종교와 철학과 과학이 갖는 공통 관심사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진리를 찾는 방법에 있어서 이 셋이 서로 다르다고 믿지만,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적어도 불교만큼은 과학과 그 진리를 찾는 방법이 유사하다. 불교의 방법이 깊은 명상[禪]을 통해 진리를 직관하는 것이라면,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과학적 진리는 종교적 진리와 다르지 않고, 그 진리는 우주 종교적 감정으로 직관하는 것이다. 이렇게 깨달은 두 가지 진리를 불교와 아인슈타인은 각각 ‘연기법(緣起法)’과 ‘상대성이론’으로 설명했다. 연기법은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터 비롯하는 제일 원인은 없다.’고 말한다. 대신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이고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라고 본다. 그러면 아인슈타인이 말한 바와 같이 종교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가 다르지 않다면 연기법과 상대성이론은 진리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 연기법은 상대성 이론에도 적용된다.

현대우주론의 기본 골격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대폭발모형이고, 다른 하나는 평행우주론이다. 평행우주[다중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수많은 우주로 〈법화경〉에 나오는 우주관을 연상시킨다.

연기법과 과학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의 만유인력[중력]의 법칙에 의하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은 지구와 태양이 만유인력으로 서로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지상에서 하늘 높이 던진 돌이 다시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도 다 지구가 돌에 중력을 가해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20세기 초까지 만유인력의 법칙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것처럼 보였다. 수성의 궤도가 조금 이상한 것 외에 뉴턴의 법칙은 천체의 운동을 잘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뉴턴과는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

아인슈타인은 시공간(時空間, Space-time)이 휘어졌기 때문에 물체의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참고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3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이 합쳐져 4차원 시공간을 이룬다. 일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중력장 내에 있는 물체는 모두 자유롭게 움직인다. 다만 중력장(=시공간)이 휘어져 있기 때문에 궤도운동이나 곡선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시공간이 휘어져 있기 때문에 빛의 진로도 휘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면 시공간을 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질량-에너지를 가진 물체의 분포다. 그러면 물체의 분포는 무엇이 결정하는가? 그것은 시공간의 모양이다. 즉 시공간과 물체의 분포는 어느 쪽이 먼저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결정한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연기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연기법을 그 이론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상대성이론뿐 만 아니다. 양자역학은 사물의 실재성(實在性, Reality)을 관찰대상과 관찰자의 상호관계를 통해 설명한다. 즉, 미시세계의 원자나 소립자들은 관찰자가 거기서 그것을 관찰했기 때문에 그것이 거기 있는 것이지, 관찰자와의 관계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관찰자가 의식을 가진 존재여야 하는가? 아니면 측정도구도 훌륭한 관찰자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논란 중이어서 여기서 이 문제까지 언급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적어도 양자역학은 공(空)과 중도(中道)를 말한다. 즉 양자역학의 해석에서도 연기법을 기반으로 이론과 실험을 설명하고 있다.

진화론이나 후성유전학의 가설과 이론도 연기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연기법을 기반으로 한다. 유기체와 환경은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하고 변화한다. 환경에 의해 유기체가 변화하지만, 유기체 또한 환경을 자기 생존에 맞도록 변화시킨다. 후성유전학도 마찬가지다. DNA가 유기체의 형질을 결정하지만 유전자 발현의 스위치를 작동시키는 것은 유기체의 행동이다. 뿐만 아니라 제3의 과학이라고 부르는 복잡성의 과학과 과학의 새로운 언어라고 부르는 정보이론도 연기법을 그 이론의 바탕으로 삼고 있다.

제일 원인으로 신을 부정하기 때문에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지만 연기법만 놓고 말한다면 연기법은 그 자체로서 과학이다. 그렇다면 종교와 철학과 과학이 공통적으로 관심을 갖는 우주에 대해서 불교와 현대우주론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일반상대성 이론은 연기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연기법을 그 이론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불교의 우주론

불교의 우주관은 여러 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과학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흥미로운 점은 〈장아함경〉 중 〈세기경〉에 나오는 순환우주와 〈법화경〉에 나오는 수많은 평행우주이다.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 현대우주론의 기본 골격을 크게 둘로 나누면 하나는 대폭발모형(Big Bang Model)이고, 다른 하나는 평행우주론이다. 평행우주[다중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수많은 우주로서 〈법화경〉에 나오는 우주관을 연상시킨다.

대폭발모형에서도 다중우주가 나올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대폭발모형은 우주에 시작이 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창조설을 연상시키는데 〈세기경〉은 창조설을 부정한다. 우주가 생겼다 없어지는 일을 반복하는 가운데 어떤 특정한 시기에 먼저 태어난 범천이 ‘나는 범왕이요 대범천왕이다. 나를 만든 자는 없다. 나는 저절로 있게 되었고 이어 받은 것도 없다. 일천세계에 있어 가장 자재하고 모든 이치를 잘 알며 부유하고 풍족하며 능히 만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곧 일체중생의 부모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폭발모형의 우주는 폭발과 수축을 거듭하는 순환우주와 끝없이 팽창을 계속하는 우주로 다시 나누어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관측 자료를 근거로 우주의 팽창속도는 암흑에너지의 작용으로 점점 빨라지고, 결국에는 물질도 산산이 흩어져 먼 미래에는 분자도 원자도 소립자로 갈가리 찢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 우주는 끝없이 팽창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는 모든 물질이 흩어져 암흑공간만 남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우주의 운명을 ‘빅 립(Big Rip)’이라고 한다. 그런데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펜 로즈(Sir Roger Penrose, 1931~)는 우주가 이렇게 ‘빅 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수학적 구조를 놓고 보면 빅 립의 상태는 초기 빅뱅이 시작하는 특이점과 다를 바 없으므로 ‘빅 립’에서 다시 빅뱅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이를 ‘등각순환우주론’이라고 하는데, 이 모델에 의하면 우주는 연속적이며, 영원한 순환을 거쳐 생성소멸을 반복한다.

우주론과 관련해 아직까지 모든 물리학자가 동의하는 우주모형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론의 이론적 바탕에는 연기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평행우주론은 초끈(Super string)이론에서도 나오지만, 끈 이론에서는 시공간이 고정된 무대로 주어지고 끈이 이동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하지만 일반상대성 이론은 시공간이 고정될 수 없다고 말한다. 끈 이론은 연기법을 그 이론의 바탕으로 삼고 있지 않기 때문에 궁극적 이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연기법이 과학이론에서 하나의 지침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뜻한다. 불교의 연기법은 우주과학에서도 그만큼 의미가 깊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펜로즈는 결국 우주가 소립자로 갈가리 찢어지는 ‘빅 립’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빅 립에서 다시 빅뱅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이를 ‘등각순환우주론’이라고 한다. 이에 의하면 우주는 연속적이며, 영원한 순환을 거쳐 생성소멸을 반복한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물리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Ph.D(소립자 물리학 이론)를 취득했다. 이화여대 퇴직 후 동국대 불교학과 학부 및 대학원에서 학·석사학위 취득 후 경남 함양에 약천사를 창건했다. 불교과학아카데미를 개설해 2014부터 불교와 현대물리학을 강의 중이며, 2021년 ‘불교에 대한 세 가지 오해’라는 제목으로 유튜브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천태사상으로 풀이한 현대과학〉·〈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가 있다.

 

[특집] ➋ 가람배치에 반영된 불교우주관 ― 글 주수완

“현대과학이 풀고 있는
우주의 신비로움
가람배치에 녹아있다”

불교의 사상이 가람배치에 어떻게 반영되는지에 대해서는 몇몇 연구가 있어 왔다. 예를 들어 부석사가 진입공간에서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 9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이 〈80 화엄경〉의 구성인 7처(處, 설한 장소) 9회(會, 모임 횟수)의 설법을 상징한다거나, 부석사의 건물배치가 〈화엄경〉의 ‘화(華)’자에 들어맞는다는 해석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러한 배치가 실제 의도된 것이라고 단정하기에는 근거 자료가 부족하다. 다만 티베트 밀교의 전통을 확립한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가 세운 상야사(桑耶寺)가 만다라의 평면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가람배치는 각각의 불교문화권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고, 거대한 불단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왼쪽은 미륵사지 가람배치 설계원리 추정도. 오른쪽은 문두루비법을 위해 조성된 경주 사천왕사지의 금당, 동·서탑과 12지신단이 조합된 평면.

사천왕사에 담긴 소천세계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석굴암의 조형원리를 그 비례에서 찾고, 정사각형과 대각선이 반복적으로 교차하며 높이와 너비를 결정하는 설계에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원리가 반영되어 있다고 본 견해 역시 중요한 불교우주관의 반영이다. 한발 더 나아가 이를 가람배치에 있어서 건물들 간의 배치와 간격에까지 확장한 해석 역시 가람배치에 대한 불교우주관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미륵사지나 정림사지의 평면을 해석하는데 있어 삼각형·정사각형·원형을 조합해 설계원리를 추적한 도면을 보면 티베트 만다라의 구도와 상통하는, 불교의 우주관을 담은 개념임을 확인할 수 있다.

가람배치가 하나의 우주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경주 사천왕사(四天王寺)이다. 명랑(明朗)법사는 문두루비법[밀교 주술]을 시연하기 위해 사천왕사를 조성했는데, 이때 분명한 법식(法式)이 있었다. 이 법식에 따라 가람과 존상을 배치해야만 문두루비법은 효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문두루비법과 같은 주문[다라니, 범어로 된 주문]을 시연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단(壇)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다라니집경〉에 상세히 소개돼 있다. 다만 사천왕사는 절 안에 단을 세운 것이 아니라, 절 자체가 단이자 만다라였다는 점에서 보다 본격적인 우주적 가람배치였다고 하겠다.

사천왕사에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12개의 기둥이 네모난 평면을 이루며 박혀있고, 신단 2개가 금당 뒤편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12지(支)를 새긴 기둥 자리였다. 동양에서 12지는 시간과 공간을 상징하는 동물이므로 이 두 단은 각각 시·공을 상징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경복궁의 근정전 주변을 12지가 새겨진 난간, 즉 월대(月臺)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사천왕사 12지 신단 앞에 세워진 두 개의 불탑은 신라 쌍탑가람의 효시이자 표준이 되는데, 이 쌍탑가람은 부처님을 중심으로 각각 시·공을 상징하는 동·서탑이 이루는 삼각형 안에 우주를 담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삼각형은 불교에서 우주의 중심을 이루는 수미산(須彌山)에 속한 소천세계(小千世界)를 표현한 것이다.

결국 가람배치를 통해 불교의 우주관을 읽는다는 것은 이처럼 사찰 권역 전체를 하나의 만다라로 분석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만다라적인 해석을 위해서는 넓은 평면, 즉 평지가람에서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설계되었을 때라야 적용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산에 위치한 사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평면배치를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이런 규칙들을 다양하게 변용했을 것이다. 이런 변용을 통괄해 살피는 것은 아직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므로, 여기서는 부분적이나마 불교적 우주관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되는 가람배치의 구성요소들을 살펴보고, 앞으로의 본격적인 연구에 초석을 마련해보고자 한다. 이런 부분적인 요소들은 일종의 모듈이 되어 산지가람이라고 하더라도 공간에 맞춰 다양하게 연결이 가능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경우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산전(중앙)과 약사전(왼쪽), 극락전(오른쪽)이 둘러싸고 있는 통도사 하로전 영역. 거품 표면에 여러 우주가 존재한다는 거품우주론을 연상케 한다.

통도사 하로전과 거품우주

먼저 불교 가람배치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사동중정형(四棟中庭形, 앞뒤로 누각과 법당을 좌우로 요사를 둔 형태) 배치를 살펴보자. 서양식 공간배치가 건물을 중앙에 두고 마당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면, 동양은 일찍부터 사합원(四合院) 구조라고 하여 중앙 공간을 건물이 사방에서 둘러싸는 공간배치를 선호했다. 동아시아의 전통 건축양식인 사합원과 비교할 때 사찰의 사동중정형 배치는 중앙의 공간 한가운데에 불탑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런 구성은 우리가 흔히 사방불이라고 하는 네 방위의 부처를 중심으로 한 우주관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밀교에서의 사방불 배치와는 다르게 우리나라는 주로 동쪽의 약사불, 서쪽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하는 사방불 개념을 발전시켜온 것 같다. 대표적인 예로는 통도사의 하로전(下爐殿) 영역을 들 수 있다. 한쪽 측면에 극락전, 맞은편에 약사전을 두고, 다른 축에 영산전을 두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셨다. 마지막 방위에는 보통 불전이 아니라 누각이 배치되는데, 만약 사방불을 모두 표현하려는 의도였다면 미륵불이 봉안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한 공간을 네 부처님이 둘러싸는 개념은 마치 현대과학에 등장한 거품우주이론과 유사하다. 빈 공간을 중심으로 팽창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한 가운데 서있는 불탑은 우주를 상호 연결시켜주는 초끈, 혹은 암흑에너지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편 작은 사찰은 주불전 하나로 구성되기도 하지만, 큰 사찰의 경우는 두 곳의 불전이 축을 이루고 있는 경우도 많다. 삼국시대의 가람배치는 ‘1탑 1금당’ 구성의 백제가람과 ‘1탑 3금당’의 고구려가람으로 구분된다. 대체로 백제가람은 금당을 중심으로 일직선 축선을 하고, 고구려가람은 탑을 중심으로 금당이 둘러선 중앙집중형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고구려식 가람은 거대한 목탑을 중심으로 삼는데, 이것은 수미산과 이를 둘러싼 전각들로 각각 남섬부주(南贍浮洲), 북구로주(北俱盧洲), 서우화주(西牛貨洲), 동승신주(東勝身洲)를 나타낸 것처럼 보인다.

이후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불전을 두 군데 이상 배치하되, 원형이나 방형의 고구려식 닫힌 구도가 아닌 열린 구도로 배치하는 등 보다 다양하게 발전한다. 구례 화엄사는 각황전과 대웅전이 ‘ㄱ’자형태의 축선을 구성하고, 법주사와 금산사는 유사한 ‘ㄱ’자형 축선이면서도 두 축선이 만나는 지점에 팔상전 혹은 금강계단과 같은 사리탑이 자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만약 부처님이 모셔진 법당을 하나의 소우주라고 한다면, 이처럼 둘 이상의 불전으로 구성된 사찰은 ‘멀티 유니버스(다중우주이론)’인 셈이다. 의상계 화엄사찰에서는 대웅전과 극락전 조합으로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을 통해 멀티 유니버스를 담아내는 경향을 보이는데, 안동 봉정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법상종에서는 미륵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을 통해 멀티 유니버스를 시각화했는데, 경주 감산사(甘山寺)를 예로 들 수 있다. 전각으로 남아있는 경우는 찾기 어려우나 천태종처럼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에서는 석가모니불과 다보불로 멀티 유니버스를 구성했을 것이다.

평행우주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해인사 장경판전의 두 건축인 법보전과 수다라장. 각각의 내부에 동일한 모습의 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하고 있었다.

장경판전과 평행우주

그런데 이 중에서 봉정사는 두 전각이 ‘ㄱ’자로 꺾인 축선을 보이지 않고, 극락전과 대웅전이 나란히 놓여있는 독특한 구성을 보인다. 이런 경우는 멀티 유니버스의 특별한 형태인 평행우주적 사고의 반영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평행우주로 세분화된 우주관에서는 석가불+아미타불의 조합에서 석가모니불을 비로자나불로 변형한 비로자나불+아미타불을 주불로 봉안한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경주 불국사, 풍기 비로사를 예로 들 수 있다. 현재 비로사는 두 불상이 나란히 한 전각에 봉안되어 있으나 원래는 불국사처럼 각각의 전각에 모셔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해인사 비로전의 쌍둥이 비로자나부처님 두 구는 이러한 불교적 평행우주론의 정점일 수도 있다. 석가불+아미타불, 비로자나불+아미타불의 평행우주가 비로자나불+비로자나불로 승화된 것은 사사무애(事事無礙, 다양한 현상과 존재가 완벽히 상호관계를 맺는 상태)의 단계로 평행우주에서 각각의 우주마저 하나로 이어진 것을 통찰하는 깨달음의 단계를 시각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두 부처님상은 원래 장경판전의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각각 모셔져 있었는데, 장경판전의 길고 나란한 두 전각의 평행선적 배치를 보면 더더욱 평행우주적 관념의 시각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가람에 우주관을 담는 설계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까? 우리나라의 사례로 볼 때 앞서 언급한 만다라적 배치는 사천왕사가 그 시원에 가깝다. 하지만 본격적인 반영은 아마도 8세기 중반 불국사와 석굴암이 조성될 무렵이 아닐까 생각한다. 불국사의 기단은 지반의 연지에서 시작되어 막돌쌓기, 허튼층쌓기, 목조건축 순으로 단계적 변화를 하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혼돈(카오스)에서 질서(코스모스)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인간·법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또한 수미산과 33천의 개념을 축약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만다라·수미산 등의 개념이 결합하면서 점차 신라의 가람은 소우주를 넘어 삼천대천세계의 축약판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주수완
현 우석대학교 조교수. 미술사학자.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사학위를,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대승설법도상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미술사연구소 책임연구원, 고려대학교(세종) 고고미술사학과 조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한국의 산사 세계의 유산〉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특집] ➌ 우주 속에서 참나 찾기 ― 글 박영재

불교우주관에 담긴 正覺은
통찰과 나눔의 삶이 핵심
“형식·전통보다 본질 눈떠야”

과학의 발달과 함께 인류의 우주관은 급변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민간인을 태운 우주선이 사흘간 지구를 돌다가 무사 귀환했다. 우주관광시대가 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진은 우주 비행사가 우주 정거장에서 우주유영을 하는 모습.

우주가 과학적으로 밝혀질수록 인류의 행동반경도 점점 넓어졌다. 스페이스X는 지난 9월 16일 미국 케네디우주센터에서 민간인 4명을 태운 크루 드래건을 575㎞ 궤도로 쏘아 올렸다. 이후 사흘간 시속 2만 7,359㎞로 지구 주위를 90분에 한 바퀴씩 선회하다가 3일 후 무사히 귀환하며 우주관광시대가 멀지 않았음을 알렸다. 이처럼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류의 우주관도 변화를 거듭해 오고 있다. 그런데 그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종교적 우주관도 과학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필자는 우주 관광시대를 목전에 둔 상황을 고려 ‘우주 속에서 참나 찾기’란 주제 아래 불교의 바람직한 역할에 초점을 맞춰 원고를 집필코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의 과학적 성찰을 곁들이며 불이(不二)와 초월(超越)의 선불교적 우주관을 잘 엿볼 수 있는 공안(公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우주관의 변천

신화시대에서 출발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노예를 소유했고, 부유층은 여가가 생겼다. 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의 발달은 신과 인간, 신과 자연의 분리로 이어졌다. 그러자 자연현상을 관찰하는 자연학이 발달했다. 물론 이런 학문 전통은 중세 때 ‘모든 것은 신께 여쭈어보면 된다.’는 교부철학의 발달로 한동안 주춤하기도 했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한데 이어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달의 분화구를 목격하고 지상계와 천상계가 다르지 않음을 증명한 후 ‘눈으로 확인된 것’만이 진리라고 주창했다.

17세기에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 최초로 자연현상의 법칙화에 성공했고, 인류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19세기 다윈은 ‘적자생존의 법칙’이 담긴 ‘진화론’을 주창하며 신(神) 중심의 종교적 세계관을 밀어내고, 인간 중심의 과학적 세계관을 확립했다. 20세기에는 4차원 시공간을 바탕으로 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근간으로 하는 양자물리학과 DNA 분자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유전자 이론이 확립됐다. 그리고 21세기 양자정보와 인공지능시대로 접어 들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과학적 우주관은 아직도 진화 중이다. 그 현주소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주에 무한한 호기심을 가진 과학자들은 일관되게 두 가지 빅퀘스천에 초점을 맞춰 자연현상을 탐구하고 있다. 하나는 ‘우주를 이루고 있는 기본입자는 무엇인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들이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해 오늘과 같은 모습의 우주를 형성하게 되었는가?’이다. 그 결과 인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1. 대폭발우주론에 따르면 우주는 138억 년 전, 한 점에서 대폭발 후 팽창을 계속해 오고 있다.(물론 평행우주론에 대한 연구도 병행되고 있다.) 2. 핵융합과정을 통해 지구에 청정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는 태양은 50억~100억 년 전 형성돼 앞으로 100억 년 후 핵융합과정을 멈추고 소멸할 것이다. 3. 지구는 46억 년 전 형성됐으며, 20억 년 후 팽창하고 있는 태양에 녹아 사라질 것이다. 4. 지구상에 인간이 출현한 것은 겨우 백만 년 전이다. 5.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입자는 6개의 쿼크(Quark), 6개의 경입자, 네 가지 기본힘의 매개입자들(중력자는 아직 미발견) 및 힉스 입자(Higgs particle)이다. 또한 이들 입자 사이에 네 가지 기본힘, 중력·전자기력·약력·강력이 작용해 오늘과 같은 모습의 우주가 형성되었다.

무문혜개 선사의 ‘여자출정(女子出定)’ 공안은 불교의 우주관을 뛰어넘는 초월의 시공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선불교의 우주관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중세적 우주관에 스며들었던 그리스의 우주관을 분리해 순수한 종교의 영역으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불교의 우주관 역시 사찰 건축양식에 수용된 우주의 중심 수미산(須彌山)을 기준으로, 지은 업(業)에 따라 육도를 윤회하는 뭇 생명[有情]이 살고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경전에 유입된 수미산 중심의 인도 설화나 여성 차별 관습 등을 분리해내면, 불교의 핵심인 석가세존의 정각(正覺)이 명료하게 드러나 미완성 진행형인 과학과 달리 그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제도권 불교의 우주관을 뛰어넘는 초월의 시공관(時空觀)을 잘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보기를 하나 들고자 한다. 본래 인도 경전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가 지은 〈무문관(無門關)〉에 수록된 ‘여자출정(女子出定)’이란 공안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문수보살이 세존을 방문했을 때는 뭇 부처들의 모임이 해산할 무렵이었는데, 자신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존귀한 세존 곁에 한 여인이 선정(禪定)에 들어 있었다. 문수가 세존께 그 까닭을 묻자 여인을 깨워 직접 물으라고 하셨다. 이에 문수가 여인을 범천(梵天, 수미산 꼭대기에 위치한 33천 가운데 하나인 천상계)까지 들어올리는 등 온갖 신통력을 부렸지만 깨울 수 없었다. 그러자 세존께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망명(罔明)보살을 불렀는데 즉시 땅속에서 솟구쳐 예배를 드렸다. 세존이 그에게 여인을 깨우라 명하자 망명이 손가락을 한 번 튕겼고 여인은 즉시 선정에서 깨어났다.”

사실 선사들은 ‘우주 반대편 끝에 있는 망명이 세존의 부름에 시공을 초월해 빛보다도 빠르게 세존 앞에 나타나는, 과학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상황’을 제시하며 제자들에게 이것마저 뛰어넘을 것을 다그치고 있다. 또한 역전된 상황 설정을 통해 신통력에 대한 환상이나 ‘여성불성불론(女性不成佛論)’과 같은 편협한 여성관을 무력화시켜, 수행자로 하여금 신참[망명]이니 구참[문수]이니, 여인이니 남자[문수]니 하는 이원적인 분별심을 철저히 내려놓도록 몰아가고 있다.

필자는 불교와 우주(과학)의 만남이 ‘독립이론’이나 ‘대화이론’의 범주에서 가능하리라 본다. 즉, 불교인들은 우선 이들 두 유형을 지지하는 이웃종교인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종교의 본질을 통찰하고,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종교 간의 만남과 상호작용

그동안 주로 서구에서 종교(특히 기독교)와 과학은 극심한 갈등과 대립을 포함해 다양한 형태로 전개돼 왔다. 핵물리학자인 이안 바버 교수는 저서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에서 이들의 상호작용을 갈등이론·독립이론·대화이론·통합이론으로 나눠 기술했다. ‘갈등이론’은 성서문자주의자는 진화론이 종교적 신념과 맞지 않는다고 믿는 반면, 무신론을 믿는 과학자들은 진화의 과학적 증거는 유신론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견해다. ‘독립이론’은 종교와 과학은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다른 기능을 수행하지만 상호보완적인 관점을 제공한다는 견해다. ‘대화이론’은 과학 자체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 제기될 때 비로소 종교와의 대화가 가능해질 수 있으며, 아울러 특정한 과학 이론과 종교적 믿음 사이의 개념적인 유사성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관한 보다 깊은 이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견해다. 마지막으로 ‘통합이론’은 과학과 종교를 폭넓은 동반자관계로 보아 긴밀한 통합을 모색하자는 견해다.

필자는 불교와 과학의 만남이 ‘독립이론’이나 ‘대화이론’의 유형 범주에서 가능하리라고 본다. 즉, 불교인들은 우선 이들 두 유형을 지지하는 이웃 종교인들과의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종교의 본질을 깊이 통찰하고, 서로 도우며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참고로 ‘독립이론’에 관한 좋은 예를 들어보겠다. 아인슈타인은 비록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양자물리학을 수용하진 않았지만, 김성구 교수께서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에서 제창했듯 연기론과 대비되는 상대성이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깊은 내적 통찰을 체험했다고 판단된다.

로버트 H 킹의 저서 〈토머스 머튼과 틱낫한 : 참여하는 영성〉에서 토마스 머튼(1915~1968) 신부는 “내적 묵상과 외적 활동은 서로가 본질적으로 반대가 되기는커녕 동일한 하느님 사랑의 두 측면이다. 불교의 빛이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렇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즉, 그의 이런 고백은 불교의 ‘공(空)’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철저히 자기 비움의 길로 나아갔기 때문이라 사료된다.

또한 인도 출신 예수회 앤소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 1931~1987) 신부가 선사들을 포함해 동서양 영적 스승들의 가르침을 섭렵한 후 깊은 통찰체험을 바탕으로 지은 〈종교박람회〉 가운데 백미인 ‘구루의 고양이’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힌두교의 영적 스승인 구루가 저녁예배를 드리고 앉을라치면 번번이 사원을 배회하는 한 고양이가 사원 안으로 들어와 예배를 방해하곤 했다. 그러자 이 구루는 저녁에 예배를 드리는 동안만 고양이를 매어 두도록 했다. 그런데 이 구루가 죽고 나서도 오랫동안 저녁예배 때면 그 고양이는 묶여 있었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죽자(뒤를 이은 제자 구루의 지시에 의해 방해를 한 적 없는) 또 다른 고양이가 사원으로 붙잡혀 오게 되었다.(저녁예배 동안 격식에 맞게 매여 있게끔) 몇 세기 후 뒤를 이은 학자 구루가 유식한 논문들을 썼다. ‘저녁 예배를 드릴 때 고양이의 필수적인 구실’에 관하여.”

그는 이 일화를 통해 모든 종교에 존재하는 형식적인 전통보다는 본질적인 개별적 영성에 눈뜨라며 통렬하게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종교를 넘어 다른 좋은 수행 전통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고칠 것은 즉시 고치며 향상의 길을 이어가기를 간절히 염원해 본다.

십우도의 핵심은 마지막 두 단계인 ‘반본환원’과 ‘입전수수’이다. 즉, 선수행자라면 필연적으로 1~9단계까지의 통찰 체험을 바탕으로 10단계인 나눔 실천적 삶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천태종 안동 해동사 ‘반본환원’(좌)과 ‘입전수수’(우) 벽화.

‘참나’ 찾고 함께 나누기

필자의 견해로 불교의 핵심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선종사에 따르면 세존의 법문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다문제일(多聞第一)’ 아난존자는 세존 생전에 참나를 체득하지 못했다. 물론 세존 사후 크게 분발해 마침내 가섭존자의 법을 이었다. 반면에 아무리 애써도 짧은 한 구절조차 외우지 못했던 ‘둔근제일(鈍根第一)’ 주리반특은 세존께서 직접 일러준 “먼지를 털면 깨끗해진다.”는 구절을 염송하다가 세존 생전에 모든 번뇌를 털어내고 참나를 체득했다.

사실 이들 일화를 통해 우리는 지적 능력 유무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과 코드가 맞는 수행법으로 치열하게 수행을 이어가다 보면 반드시 깊은 통찰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걸 파악할 수 있다. 부연하자면 불교 지식은 말할 것도 없고, 과학에 대한 지식이 어떤 이들에게는 수행의 길로 들어서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무지하더라도 얼마든지 참나를 체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주와 관련한 과학적 대목들이 대부분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도 전혀 상심할 필요는 없다.

북송 시대 곽암사원(廓庵師遠) 선사는 수행자들이 단지 수행과정에 불과한 화두 타파에만 몰두하며 일생을 덧없이 보내는 모습을 보고 ‘참나’를 ‘잃어버린 소’에 비유해 소를 찾는 과정을 ‘십우도(十牛圖)’로 그려 이를 일깨우고자 했다. 특히 마지막 두 단계인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제9단계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감’을 뜻하는 ‘반본환원(返本還源)’과 제10단계 ‘저자거리에 들어가 더불어 함께 함’을 뜻하는 ‘입전수수(入鄽垂手)’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선수행자라면 필연적으로 1~9단계까지의 통찰(洞察) 체험을 바탕으로 10단계인 나눔[布施] 실천적 삶을 저절로 이어가게 될 것이다. 물론 1-9단계는 편의상 나눈 것일 뿐, 비록 아직 ‘나’라는 아집(我執)이 남아 있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1-8단계에서도 누구나 형편 되는대로 나눔을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다.

과학은 자연현상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나눔’에 대한 기여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과학이 또 다른 비유의 보고임을 실감나게 하는 관련 보기가 있다. 1964년 힉스 교수는 대폭발 직후 생성된 힉스 입자가 물질계의 보살처럼 자신을 희생하며 현재 존재하는 물질들에게 질량을 주고 사라지는 ‘힉스 얼개’를 이론적으로 제창했다. 그 후 2013년 3월 힉스 입자가 실험적으로 검증되자 그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오늘날 과학적 우주관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역사는 대폭발 이후 약 138억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만일 오늘에 이르기까지 낳아주신 부모님을 포함해 우주의 조건이 조금이라도 달라졌더라면, 우리는 현재 이 순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날 확률이 거의 ‘0’에 가까운 우리는 지금 숨 쉬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비롭고 소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비록 머리로는 소중한 존재임을 이해했더라도 온몸으로 참나를 체득해,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분별없이 살아가는 것은 별개이기 때문에 누구나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처한 상황에 관계없이 남은 생애 동안 우리 모두 일상 속에서 자기성찰의 삶을 치열하게 이어가며 남과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유일무이한 향상의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 신비로운 존재에 걸맞은, 통찰과 나눔이 둘이 아닌 ‘통보불이(洞布不二)’의 값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참나를 온몸으로 체득하는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서강대에서 박사학위(입자이론물리 전공)까지 받은 후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거쳐 1989년부터 올 2월까지 서강대 교수로 재직했다. 1975년 선도회 종달 선사 문하에 입문했고, 1990년 종달 선사 입적 후 선도회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1991년과 1997년 숭산 선사께 두 차례 입실점검을 받았다. 저서로 〈무문관‐온몸으로 투과하기〉·〈날마다 온몸으로 성찰하기〉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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