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日 불교 교류 역사 간직한 천년고찰

◇천태산 만년사 대웅보전(좌)과 본존불(우). 대웅보전 오른편으로는 강원과 객실이 들어서 있다.

만년사는 국청사에서 차로 약 40여 분 거리에 있는 천태종 사찰이다. 국청사에서 화정사 쪽으로 가다가 삼거리에서 만년사 안내판을 따라 산길로 몇 구비를 넘으면 시야가 확트이면서 만년선사(萬年禪寺)가 나타난다. 저 멀리 만년산 8봉우리가 양쪽 계곡으로 흐르고 절 앞으로는 평야가 전개돼 진복전(眞福田) 복지(福地)라고 한다.

온화한 만년산 봉우리 밑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이 절은 천태산의 퇴락한 천년 고찰의 하나로 꼽힌다. 절 입구에는 수령이 수백 년 됨직한 거대한 상록수가 그 역사를 말해 준다.

만년(萬年)의 복밭에 자리해
퇴락한 건물들은 근래에 다시 중건했고, 현재에도 불사 중에 있다. 천태종불학원은 몇 년 전만 해도 천태대사 육신탑이 있는 진각강사에 있었으나, 이곳으로 옮겨와 있다.

이 절은 국청사보다도 일찍 설립됐다. 1600여 년 전 돈황고승 담유(曇猶)가 동진 흥녕 연간(363~365)에 처음으로 오백나한도량을 개창했다고 한다. 그 뒤 당나라 때(833년)에는 백장회해(百丈懷海)의 고족(高足) 보안(普岸)이 이곳에 와서 평전선원(平田禪院)을 건립한 후 다시 나한전을 건립했다.

그 후 회창법난 때 폐사됐다가 852년 다시 개창하고 ‘진국평전사(鎭國平田寺)'라 칭했는데, 이때 신라 도육(道育) 스님이 이곳에 와 수행했다. 이후 수차례의 중수를 거치고 절 이름도 바뀌면서 흥폐를 겪었다. 후양 용덕 연간(921~923)에는 복전사, 송의 옹희 2년에는 수창사, 그 뒤에도 천령만년사, 소흥 9년(1139)년 보은광효사로 됐다가, 그후 다시 만년사로 바꿔 오늘에 이른다.

돌고래를 탄 관음보살.

그래서 어떤 전적에는 평전사 만년보은사 등으로 불리고, 현재는 현판에 ‘만년선사'라 돼 있다. 만년사는 국청사의 옹호사찰로 귀속됐다고 한다.담유는 만년사를 세우고 석교를 건너 적성으로 가 그곳 석실에서 마지막 생을 보냈다고 한다. 만년사는 남송 후기에는 강남 10대 선찰(禪刹)에 들어갈 정도로 번창했다. 이때의 기록에는 경내에 불전 나한전 법당 대사당 각음 방장실의 중심 건물과 단나 행자당 곳간 니료(尼寮, 비구니승당) 선당 논장건물 등의 부속건물들이 40여 개소나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고 전한다.

만년사 가람의 배치는 산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뻗은 길을 따라 천왕문으로 들어가게 돼 있고, 천왕문을 나서서 계단을 올라서면 웅장한 대웅전의 모습이 앞에 펼쳐진다.

대웅전 뒤쪽에는 스님들의 전각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강원과 객실이 차례로 늘어서 있다. 대웅전은 천태산 여느 사찰의 본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셨고 좌우의 벽면에는 근래 조성한 것으로 보이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한 금동 나한상들이 늘어서 있다. 맨 뒤에는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과 특이하게도 돌고래를 탄 관음보살상이 있다.

이 절의 고승으로는 만년사탑(지금은 전하지 않음)을 세운 자순(自詢) 선사가 있다(《천태산지》 제13권). 자순은 일찍이 연비(燃臂)해 부처님께 공양 올리기도 했다. 옹희초(984) 칙명으로 수업사(受業寺)를 세우고 몸을 사루어 나라에 보답하기로 했는데, 불이 다 꺼졌으나 설근(혀)이 타지 않았다고 한다. 혀가 타지 않고 남은 것은 주로 《법화경》 독송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영험한 현상이다. 설소(雪巢) 법일(法一)은 만년사 관음원에서 가부좌하고 입적했다고 한다.

이밖에 담관(曇寬), 마공(馬公), 도한(道閑) 등도 만년사의 뛰어난 고승들이라 한다.

이 절은 청의 가경(嘉慶) 연간(1796~1820)에는 매우 흥성해 전당의 승방이 천여 칸이나 되었고 한 번에 출가하는 승려가 500여 명이나 됐다고 전해진다.

이 절 대웅보전에는 두 사람이 껴안을 정도의 큰 기둥이 있어 ‘만년사의 기둥[萬年柱]'으로 세간에 회자되기도 했다. 당시 세간에서는 국청사의 소나무, 탑두사(塔頭寺. 진각강사)의 바람, 고명사의 종, 화정사의 안개와 함께 천태산 5대 특색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대웅전 기둥은 보통의 기둥으로 돼 있어, 중건 과정에서 소실돼 버린 것으로 보인다.



신라 도육 스님 자비행 펼친 곳

도육 스님은 신라인이라는 것만을 알 뿐 성씨나 출신지 등이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신라 말 진성여왕 때(891년)인 34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80여 세(938년)에 입적했다. 스님이 어떤 동기와 경로로 중국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처음에 들어온 곳이 천태산이고, 걸음을 옮겨 천태종 제일의 사찰 국청사 소속 이곳 평전사(平田寺)에 이르러 교화를 펴다가 일생을 보냈다는 것이다.

도육은 항상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중들을 대했고, 중국어를 쓰지 않고 늘 고국어로 말하며 지낸 분이라 한다. 항상 앉아서 수행하고 결코 자리에 눕지 않았다. 목욕물을 준비하고 차 끓일 때에는 장작나무 속에 굼벵이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먼 곳에 갖다 놓아주는 등 스님은 아무리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생명이 있는 것들은 결코 가벼이 하지 않았다.
절의 여러 전각을 청소하고 주방에서 요리하는 일을 할 때는 자신은 늘 음식 찌꺼기로 공양하고, 좋지 않은 음식이 있으면 모아 놓았다가 자신이 먹었다.

또한 스님의 입는 옷은 헝겊을 주어다가 더덕더덕 기어 입으므로 적잖이 무거운 옷이었는데 스님은 매년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해가 기울어 저녁 때가 되면 가슴과 배 장딴지를 일부러 드러내 놓아 주린 모기·등에 등 여러 벌레들에게까지 자애를 베풀었다. 어느 땐 곤충들이 깨물고 쏘아서 피가 흥건하게 흐를 정도였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이같은 보시행을 40여 년 간 거의 그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언제나 손님들을 만나면 오로지 “이이(伊伊)!” 두어 마디만 할 뿐이었다. 중국말은 거의 통하지 않지만, 그 사람의 뜻을 알아차려 조금도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스님의 모습은 정수리에 머리털이 드리우고 흰 눈썹 또한 더부룩하게 보였지만, 신이한 행적도 많았다. 어느 때는 몸에서 감적색(紺赤色) 사리가 나와 구슬 같았는데 사람들이 간혹 구하면 모두에게 나눠 줬다.

도육존자는 후진(後晋) 천복 3년 938년 10월 10일 스님 방에서 입적했다. 이 때가 80여 세. 화장을 했는데 사리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오고 혹 어떤 이는 큰 뼈를 얻기도 했다. 일찍이 입적하기 3년 전에는 석양(石梁)에 가회와 도육 스님이 함께 머문 적이 있었다. 스님은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나무 등걸을 지피고 입으로 불어서 태우느라 밤새도록 ‘후~후~'란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석양은 옛부터 오백나한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유명하고 천태대사도 이들을 만난 적이 있는 곳이다. 보통 나한들에게 공양드리는 큰 재가 있는 날에도 도육은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니 도육이 나한들을 맞아들이는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그때 사람들이 도육에게 “스님은 왜 전각 안에 들어가서 공양을 받지 않으십니까?”하고 물으니, 그냥 “이이(伊伊)”라고 하고 가 버리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혹 벌레들에게 몸을 내놓고 뜯기는데 피가 흥건하기도 했다. 그래서 호랑이 무리들이 와서 냄새를 맡고는 머뭇 머뭇거리다가 그냥 슬그머니 가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듯 성인의 행을 하였기에《천태산방외지》에서는 도육존자를 ‘성승(聖僧)'이라 칭하고 있다. 스님의 천태사상을 알 수 있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수행이 매일 경행을 하였고 누워자지 않고 앉아서 수행[常座]했다고 하니 천태의 상좌삼매행을 닦았나 보다. 도육존자의 자애로운 행동과 신이한 결과들은 그의 각별한 수행과 숭고한 자비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만년사와 일본불교
일본 스님들의 왕래는 더욱 빈번해 남송 때(1168년) 일본승 영서(榮西)가 제호사 승 중원(重源)과 함께 천태산에 왔다가 5개월 간 머물고 불교의 새로운 장소(章疏)들을 가지고 귀국했다.
그후 20년이 지나 다시 중국에 왔는데 이 때 만년사로 와서 당시 주지 회창(懷敞)을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만년사가 임제종 선찰이었으므로 임제선을 공부했다. 이곳에서 스승을 따라 영파 천동사(天童寺)로 옮겨가 그곳에서 대계(大戒)를 받았다. 그리고 이때 의구(衣具)와 인신(印信)을 받았다. 후에 천태산으로 들어와 각 사원을 수선하고 건립하는데 노력했다.

그 결과 송의 효종에게 천광법사(千光法師)의 칭호를 받았다. 특히 영서는 삼문 양쪽 낭무를 만들었고, 지자대사 탑원이 무너진 것을 수리해 중국불교계에서 매우 호의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191년 일본으로 돌아가 당나라 사찰을 모방해 동경에 건인사(建仁寺) 등을 건립하고 일본에 천태종 밀종 선종을 전파하는 도량으로 삼았다. 또한 자신이 구법한 3종파를 융합시켜 일본 임제종을 형성했다.

이후 100년이 지나 영서의 제자 도원(道元)과 법손 원이(圓爾) 변이(弁爾)가 다시 중국에 들어 구법하고 귀국해서 일본 조동종을 창립했다. 그래서 일본 불교계는 만년산을 일본 임제종과 조동종의 개산(開山)으로, 천동사를 조동종의 조정(祖庭)으로, 만년사를 선종의 조정으로 본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은 중국과 일본의 불교교류의 중요 사찰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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