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어두운 길 곳곳에 빛이 되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밝혀주셨습니다. 낮고 높은 데를 가리지 않고 환한 빛으로 가야 할 곳을 일러주시니 우리는 부처님을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로 칭송(稱誦)하며 우러러 봅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중생들의 무명(無明)을 타파하고 광명(光明)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한 절망의 터널에서 벗어나 환하게 빛나는 광명의 길에 서게 되면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우리에게 환희이며 축복입니다. 어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로선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구원이며 희망입니다. 

무명은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한 점의 빛마저 없는 캄캄한 곳에서 어디로 걸음을 떼야 할 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에게 있어서 무명의 세계란 망집(妄執)과 사견(邪見)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헛된 망상에 집착하는 망집과 잘못된 생각이 지배하는 사견이야말로 진리를 가리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이러한 망집과 사견은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탐진치(貪瞋痴)로 인해 만들어집니다. 불교에서는 이 탐진치를 가리켜 삼독심(三毒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삼독심을 극복해야 망집과 사견에서 벗어나 무명을 타파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무명이란 지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입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무명을 없애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에 대해 경전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카필라성이 아기왕자의 탄생에 모두 기쁨으로 가득 차 경축하고 있을 때 덕망이 높은 아시타 선인이 왕궁을 찾아와 태자를 보게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백 살이 넘은 백발의 아시타 선인은 아기 태자를 안고 한참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왕을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선인이여, 어찌하여 갑자기 우는지 그 까닭이 궁금합니다.”

아시타 선인이 왕의 말에 답하였습니다.

“대왕이시여! 염려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태자는 세계를 지배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갖춘 상호로 보아 태자는 반드시 출가하여 위대한 부처님이 되실 것이온데, 태자가 훗날 성불하시어 법을 널리 펴실 때가 되면 저는 살아있지 못하므로 그 법을 듣지 못하는 것이 슬퍼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슛도다나왕은 태자가 전륜성왕이 아니라 부처가 된다는 아시타 선인의 말에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렇지만 전륜성왕보다 훨씬 뛰어난 상을 지녔다는 말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실제로 태자는 아시타 선인의 예언처럼 카필라성을 탈출해 훗날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성취하시고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태자가 왕위를 버리고 출가를 단행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중생들이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을지 그 길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치열한 수행을 통해 중생의 고통이 다름 아닌 무명에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무명이 왜 중생들에게 고통의 원인이 되느냐 하는 것은 12연기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12연기의 과정을 나열하면 ‘무명-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입니다. 이를 해설하면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 일어나고, 행으로 말미암아 식이 일어나며, 식으로 명색이 생기고, 명색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촉을 일으키며, 촉이 이를 받아들여 감수작용이 발생하며, 애욕과 집착을 부릅니다. 집착이 유를 있게 하며, 유가 태어남을 부르며, 태어남이 늙고 죽음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12연기의 모든 비롯됨은 바로 무명에서 출발합니다. 즉, 무명에서 벗어나면 궁극적으로 태어남과 늙고 죽음을 면한다는 얘기입니다. 생사의 과보와 살아 있으면서 겪게 되는 모든 고통은 무명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므로 무명을 벗어나야 한다는 게 12연기의 핵심 가르침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광명으로 오셨지만 지금도 무명업식에 갇혀 사는 중생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무명이 어리석음이라면 광명은 지혜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지혜로운 이의 삶은 자유와 행복을 추구합니다. 반대로 어리석은 이의 삶은 욕심과 망집에 사로잡혀 매사 고통스런 일상을 반복합니다. 특히 삼독심이야말로 무명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잡아함경〉에 이르길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에 집착하지 말 것이니 탐욕을 끊어버리기 위해서요, 마음에 거슬리는 것에 성내지 말 것이니 증오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함이요, 현혹하는 말에 집착하지 말 것이니 어리석음을 끊어버리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삼독심은 고통을 불러오는 화근(禍根)입니다. 집착의 욕망이 거셀수록 지혜의 칼로 그 뿌리를 도려낼 줄 아는 이가 광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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