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대사가 두타행 때 마셨다는 우물물.


화정봉(華頂峰)은 천태산 최고봉이면서 아름다운 경치로도 유명하다. 봄에는 화정봉 두견화가 산록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화정봉은 여름에는 울창한 삼림장으로, 겨울에는 설경으로 유명하다. 일출과 운무(雲霧) 또한 화정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광이다. 더욱이 천태종을 연 지의대사(智大師)가 실상의 깨달음을 얻은 두타도량이고, 고구려 바야 스님도 스승 지의대사의 권유로 수행해 깨달음을 얻은 유서깊은 도량이다.

지의대사는 혜변(慧辯) 등 2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천태산으로 들어온 후, 곧 불롱으로 가 수선사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염원했던 두타행을 닦으러 화정봉으로 올라갔다. 화정봉에서의 수행은 《별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늦은 밤 홀연히 큰 바람이 불더니 나무가 뽑히고 우레가 내리쳐 진동이 산을 울렸다. 귀신 천 무리가 한 몸에 백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 어떤 것은 머리에 용 독사를 이고, 어떤 것은 입으로 불을 내뿜었다. 귀신의 형상은 먹구름과 같고, 그 소리는 벼락과 같았다.”

변화무쌍한 화정봉의 풍경과 마음에 일어나는 번뇌와의 치열한 싸움, 이 속에서 대사는 10년을 수행했다. 이 시기를 ‘천태은거기'라고 한다. 대사는 이때 두타행으로 갖가지 마(魔)의 변화를 항복하면서 실상을 체달(體達. 사물의 이치를 통달해 깨달음)했다고 한다. 드디어 어느날 새벽 샛별이 뜰 때 신승(神僧)이 나타나 인가하며 “번뇌의 적을 제압하고 원한의 번뇌를 이겼으니 용감하도다. 능히 이 어려움을 이겼으니 그대와 같은 자는 없으리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대사는 깨달음이 크게 열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화정개오(華頂開悟)'이다. 그는 누대에 걸친 번뇌를 끊고 일체 만물의 진실한 경지를 밝게 볼 수 있는 일실제(一實諦)를 얻었다고 한다.

지의는 대성인이(신승) 누구이며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물었다고 한다. 신승은 곧 “이 경지의 이름은 일실제(一實諦)이며 반야 지혜로 배우고 자비로 선양해야 한다”며 “나는 모두 그대의 그림자와 메아리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곧 지의대사는 실상을 깨닫고 신승의 경지, 즉 일실제를 전수했다. 지의는 스승 혜사(慧思)로부터 대소산(大蘇山)에서 법화원돈의 경지를 깨달았고, 화정봉에서는 비로소 실상의 경지를 체득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지의대사는 지적(知的)인 깨달음에서 나아가 사유의 경지를 넘어선 불가사의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유서 깊은 깨달음의 도량

지의대사가 두타행을 마치고 불롱으로 돌아오니 묘한 지혜와 깊은 삼매로 충만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천태산 시대가 열려 ‘천태대사(天台大師)'의 칭호를 얻게 됐다. 따라서 ‘화정개오'는 천태학 역사에 큰 전기가 되는 사건이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서 마(魔)를 항복받고 보리를 성취했듯 천태대사도 이곳에서 두타행을 닦고 이곳에서 연좌(宴坐)해 마의 항복을 받은 곳이라고 해 후대에 이곳에 항마탑(降魔塔)을 세웠다. 자료에 따르면 이 탑은 화정봉 정상에 세워진 7층탑으로, 중앙에는 대사의 육신을 새긴 석상이 있다. 또 여기에는 개보(開寶) 4년(971)의 명문이 새겨져 후대(송대) 사람들이 기념해 세운 것이다. 이 탑은 오랫동안 황폐돼 있던 것을 명의 왕중승 항숙(恒叔)이 중건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항마탑은 송대에 감실이 건립되고 상은 명대에 건립됐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이 파괴됐다는 설도 있다.

천태산 화정봉에 자리한 화정사

이곳 화정은 지자대사 이후에도 두타행의 수행처로 많은 천태 수행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만력 15년(1587)에도 여혜(如慧)가 이곳에 띠풀을 모아 결가부좌 3년을 수행했고, 법제(法弟) 전순(傳純) 등이 발자취를 이어 계속 수행했다고 한다. 수행자들은 이렇게 띠집을 짓고 수행해 60여 채의 띠집이 있었다고 한다. 또는 많은 승려들이 재(齋)를 행하면서 기거할 수 있는 장소로 초막을 지어 이곳에 약 72채의 모봉(茅蓬·초가집)이 있었다고 전한다.

화정은 빼어난 풍광과 천태대사의 두타도량으로 유명해져 예전부터 많은 명사들이 찾았던 곳이다. 화정에는 지자대사 항마의 유적이라 하는 귀첩석(鬼疊石)과 지자대사가 서천(인도)의 《능엄경》이 있는 곳을 향해 절했다는 ‘배경석(拜經石)'이 있다. 이 돌은 배경대라고도 하는데, 지의 대사가 여기서 《능엄경》을 읽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배경석은 중국 문화혁명 때 파괴돼 현재는 볼 수 없다. 이백이 이곳에 유람온 것을 기념해 천태종 후인들이 세운 것이 ‘태백당(太白堂)'이다. 태백당은 초가집으로 지어진 모옥으로 근래에 정비한 흔적이 보인다. 이곳은 주로 이와 같이 지붕을 짚으로 엮었다. 이태백은 이곳에 와서 빼어난 화정의 풍광에 시를 지었다. 《몽유천모음유별(夢游天吟留別)》에는 “천태산 일만팔천장[天台一万八千丈]”이라고 읊었는데(혹은 일만을 四万이라고도 함), 이 시에서 ‘일만팔천장'은 곧 화정봉을 가리킨다.

원대에 조문회(曹文晦)는 천태산 십경(十景) 중 셋째로 화정귀운(華頂歸雲)을 들고 있다. 또 화정봉 뒤쪽에는 왕희지가 이곳에 은거하며 유행했다고 하는 묵지(墨池)가 있다. 복호선사 유적으로 복호단(伏虎壇)이 있었다고 하나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바야 스님도 두타행 닦아

우리나라 스님으로는 고구려 바야(波若)가 천태대사의 안내로 화정봉에 와서 수행해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곳에 묻혔다고 한다. 《속고승전》 권17, 《신수과분육학승전》 권3, 《불조통기》 권9 등에는 스님의 신이한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대강의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바야 스님(《불조통기》에는 般若)은 진나라 때 중국에 와 금릉에서 지의대사 강설을 듣고 깊은 뜻을 이해했다. 개황 연간에 진나라가 수나라에 병합되자 이곳저곳을 유행하면서 학업을 계속했다. 개황 16년(596) 천태산 북쪽 불롱으로 와 지의 스님께 선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바야는 영리한 근기로 지혜가 뛰어나므로 곧 증득함이 있었다. 이에 천태대사는 “그대는 여기와 인연이 있으니 마땅히 한가하고 조용한 곳에[閑居靜處] 묘행을 이루도록 하라. 이 천태산 최고봉을 화정봉(華頂峯)이라 하는데 여기 절에서 육칠십리 된다. 그곳은 내가 두타행을 닦던 곳이다. 그 산은 대승의 근성이 있으니 거기에 가서 공부하면 반드시 깊은 이익을 얻을 것이다.

수행에 필요한 의식(衣食)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 바야는 개황 18년(598) 스승의 뜻을 따라 수행처인 화정봉으로 올라가 밤낮으로 잠도 안 자고 눕지도 않은 채 수행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16년 동안 산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내 대업 9년(613) 2월 홀연히 산을 내려와 처음 불롱사(佛寺)에 도착했다. 이때 그곳에 청정한 사람이 보니 세 사람의 흰옷 입은 이가 의발(衣鉢)을 가지고 뒤따라 오다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국청사에 이르러 은밀히 선우 동의(同意)에게 말하기를, “바야 스님이 자신의 수명이 장차 다해 멀지 않았으므로 대중들에게 이별을 고하려고 한다”고 했다. 과연 며칠이 안 돼 바야 스님이 병도 없이 단정히 앉아서 국청사에서 입적했다. 이때 춘추가 52세였다.  산소로 가는데 절의 대문을 나서서 돌아 하직을 고하니, 이미 열반한 눈이 뜨였다가 산소에 이르니 다시 감겼다.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이 찬탄하고 도심이 함께 발했다.

근래 중국에서 편찬한 《해동입화구법고승전》 권3에는 바야가 천태산에 들어와 만난 것은 천태대사가 입적하던 해이고, 바야가 증득한 것은 법화삼매와 삼제원융의 천태정관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대사가 입적하기 바로 전에 자신이 체험한 큰 깨달음의 길을 바야에게 열어줬다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사실이다.

바야는 당시 천태대사가 교화를 펴고 있던 불롱으로 찾아가 그로부터 뛰어난 근기로 인증받았고, 또 법화삼매와 천태의 묘관인 삼제원융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의 《국청사지》, 《천태산지》에도 중요한 천태종 고승으로 소개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천태대사가 직접 두타행에 필요한 의식을 준비해주고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화정봉 두타처로 들어가도록 했는데, 이러한 예는 다른 어떤 제자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바야가 천태대사를 찾아온 것은 598년으로 천태대사 입적한 597년과 차이가 있으나, 중국 측 자료에서도 ‘바로 천태대사가 입적하던 해'로 간주하고 있다.

또 중국 측 자료에는 바야가 입적해 안장한 곳이 ‘화정 산소'로 기재돼 있다. 그러나 바야가 화정봉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름다운 화정봉과 그 봉우리를 감싸고 스쳐가는 바람결에서 1천400년 전 바야 스님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스승 지의를 이어 고구려 출신 바야가 도를 깨달은 화정은 아늑하고 고요한 숲속의 수행도량이다. 그러나 이곳 어디에도 바야에 관한 유적이나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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