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 종의회의장 도원 스님을 비롯한 종의회 의원스님들이 러시아 신한촌 위령비에서 강제이주 고려인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천태종 제16대 종의회 해외성지순례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 3국 순방
연해주 독립운동 현장도 둘러봐

대한불교천태종 제16대 종의회(의장 도원 스님)는 지난 7월 6일부터 15일까지 8박 10일간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 3국을 순방했다. 특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옛 고려인 집단거주촌인 신한촌에서는 강제 이주 과정에서 희생된 고려인을 위한 천도재를 봉행했다. 천도재와 블라디보스토크 여정을 중심으로 종의회의원 갈웅 스님이 보내온 기행문을 싣는다. 〈편집자〉

종의회의장 도원 스님을 필두로 한 순례단 20여 명은 인천공항에서 오후 1시에 출발해 오후 4시경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연해주(沿海州)의 행정중심도시이다. 연해주는 러시아어로 ‘프리모르스키’를 훈차(訓借)한 말인데, ‘바다에 접해 있다’는 뜻이다. 면적은 16만5,900㎢이며, 인구는 190만 명을 조금 넘는다.

연해주의 독립운동

첫 순례지인 연해주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을 불태운 곳이다. 국외에서 우리 민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일찍이 항일투쟁을 했던 의병과 애국지사들이 망명해 후사를 도모한 곳이다. 연해주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이후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함경남도에서 활약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1868~1943) 장군은 간도를 거쳐 1908년 연해주로 건너왔다. 국내와 간도에서 활약하던 의병지도자들은 연해주에 당도해 국내 진공작전을 결행하기도 했다. 1910년 8월 23일 연해주의 한인들은 ‘해삼위 한민학교’에서 대회를 열어 ‘대한 국민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고 결의하고 독립운동단체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했다. 이 선언서에는 한인 지도자 8,624명이 서명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성공하는데, 이 거사는 최재형(崔在亨, 1860~1920)이란 인물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최재형은 함경도 경원에서 출생해 1869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러시아 지신허(地新墟, Tzinkhe)로 옮겨갔다. 그는 조선인 최초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세운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형수의 심한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11살이 되던 해에 가출을 했다. 굶주림으로 바닷가에 쓰러져 있는 그를 러시아인 선장이 발견해 각별히 보살펴주었다. 학식이 뛰어났던 선장의 부인은 최재형에게 러시아어와 서양문학을 가르쳤다. 그는 1871부터 6년간 이들 부부와 함께 상선을 타고 세계를 돌며 무역을 배웠고, 풍부한 지식과 폭넓은 사고를 가지게 됐다. 17세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 온 최재형은 유창한 러시아어로 한인 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를 시정해주었고, 한인 인부들을 데리고 도로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로부터 ‘은급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사업으로 1년 간 10~12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리고 연해주의 조선인 자립에 기여한 공로로 ‘도헌(都憲, 군수직급)’에 선출됐다. 그는 한인들의 교육에 힘을 쏟아 한인마을에 정교회 학교 32개를 세웠다. 안중근 의사는 1907년 해외로 망명했는데, 러시아에서 최재형을 만났다. 최재형은 1908년 독립운동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총재가 된다. 이때 안중근 의사는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항일투쟁에 사용했다. 연해주로 건너온 류인석(柳麟錫)이 ‘13도의군’을 조직할 때 총기를 구입해주는 등 무장을 도왔으며, 러시아 국경의 일본군 초소와 소규모 부대를 격파해 탄약과 소총을 탈취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는 최재형의 집에서 거주하며 사격연습을 했다. 최재형은 권총 구입을 비롯해 거사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도왔다. 그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 후 일본이 관할하지 않던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계획했고, ‘미하일로프’를 변호사로 선임했다. 그러나 1910년 일본이 불법 재판을 감행해 안중근 의사는 안타깝게 순국하고 만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느껴 안중근 의사의 가족을 돌봤다. 이 사건으로 러일전쟁 패전국인 러시아 연해주 조선인들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다. 최재형은 일본의 음모로 간첩 혐의로 체포됐지만, 곧 석방됐다. 이후 그는 많은 어려움에 처했지만, 조국독립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19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만세 운동을 주도했고, 이어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회의’에서 외무부장을 지냈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교육가·사업가·독립운동가·언론인 등 다양한 길을 걸으며 한인들을 위해 살았고, 엄청난 자금을 독립운동에 쏟아 부었다. 1920년 우수리의 집에서 지내다가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만다. 최재형 뿐만 아니라 연해주 지역에서는 500여 명의 한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했다.

비극의 역사, 고려인 강제이주

순례단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마자 재래시장을 방문해 과일 등 재의식 때 올릴 공양물을 준비한 후 신한촌(新韓村)으로 이동하였다. 신한촌은 연해주의 한인집단 거주지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적 기지역할을 했다. 1800년대 조선은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 소수의 양반이 대다수의 토지를 독점했다. 이로 인해 가난한 농민은 고향을 등지고 당시 청나라 동북지방인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했다. 초창기에는 아무르만 연안의 개척리(현 해양공원 일대)에 밀집해 거주하다 1911년 러시아 측이 콜레라 전염을 이유로 시내 북쪽의 언덕에 집단이주를 시켰다. 현재 그곳에는 신한촌 위령비가 서 있다.

위령재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종의회 스님들.

위령비가 세워진 배경에는 비극의 역사가 있다. 1937년 극동지역 위원장인 리우시코프는 당시 하바롭스크에 머물면서 스탈린의 지령을 받아 강제이주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과 접경지역(블라디보스토크)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간첩의 소지가 있는 만큼 일본인과 접할 수 없게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1937년 10월, 고려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블라디보스토크역에 소집됐고, 기차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강제이주를 당했다. 열차 하나에 600명 이상이 탔다고 하는데, 열차가 설 때마다 철로변에 주저앉아 배변을 해야만 했다. 이들은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며 굶주림에 시달렸고, 물갈이로 고통 받았다. 화물칸에는 오물이 쌓였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 강제이주된 고려인은 총 13만7,000명 정도라고 하는데, 실제는 18만 명이 넘는다는 기록도 있다.

그렇게 한 달여 만에 도착한 곳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매니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이다.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인원은 불과 3~4만 명에 불과했다. 자료에는 사망자가 2만 명에서 2만5,000여 명 정도라고 하지만 실제 희생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을에 출발한 열차는 초겨울이 다 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실려 온 고려인들은 맨몸으로 찬바람이 부는 들판에 버려졌다. 그들은 맨손으로 땅을 파고 굴을 만들어 그해 겨울을 났다. 이주 후 첫 번째 겨울을 나면서 또다시 사람들이 사망했다. 아침만 되면 이집 저집에서 사람이 죽어 곡소리가 났다고 한다. 당시 너무나 많은 영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1935~1938년생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러시아 여행 중에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모스크바에서 만난 세 명의 가이드들이 한결같이 고려인 강제이주에 대해 울분을 토했다. 특히 하바롭스크 가이드는 자신의 증조할아버지가 직접 겪은 일이라고 덧붙이며, 방송이나 보고서에 나오는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고 강조했다. 열차가 한 달 간 달리는 와중에 상당수의 사람은 도망을 치기도 했는데, 그들은 중간에 열차 밖으로 버려진 부모님의 시신을 찾으려는 게 목적이었다.

황량한 들판에 버려진 고려인들은 이듬해 봄, 황무지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불모지 땅을 일궜고, 수년 후 인근 지역은 옥토로 변해 곡창지대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로 인해 러시아 정부로부터 감사의 뜻이 담긴 상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 지역 고려인들은 자녀교육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장관도 배출했고, 많은 고려인들이 의사·교수 등 지식층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역 사회에서 ‘고려인은 근면성실하고, 강인하며, 정직하다.’는 인식이 생겼다고 한다. 또 한국의 여러 기업이 러시아에 진출해 좋은 인상을 심어주면서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는데, 그 저변에는 고려인 선조들의 피땀이 스며있다고 하겠다. 현재 중앙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우즈베키스탄 23만 명. 카자흐스탄 10만 명, 연해주 8만 명, 그 외 지역 4만 명 등 러시아 전체에 약 45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문.

고려인 희생자 위해 천도재

순례단이 신한촌에 도착 했을 때, 한국에서 온 단체 관광객이 묵념을 하고 있었다. 신한촌은 고려인들이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기 전까지 살던 곳인데, 현재 재개발로 주택단지가 들어서 있다. 그 중 한 곳에는 약 4미터 정도 높이의 돌로 된 기둥 세 개가 서 있는데, 바로 위령탑이다. 이 위령탑은 1999년 광복절에 세워졌다. 세 기둥의 앞쪽에는 둥근 형태의 돌바닥이 조성돼 있는데, 사람들은 이곳에서 묵념을 한다.

순례단은 임시로 재단을 만들어 앞서 재래시장과 마트에서 구매한 과일과 꽃 등 공양물을 진설했다. 구한말 이곳까지 건너왔지만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수십 만 고려인들의 넋을 위로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왕생극락을 하도록 위령 천도재를 올렸다. 천태종 종의회의장 도원 스님이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위해 축원문을 지어 올렸으며, 석용 스님·구수 스님·보광 스님 등 여러 스님들이 시식에 동참해 영가천도재를 봉행했다. 관리인으로 있는 노부부는 “지금까지 많은 한국인이 다녀갔지만 천도재를 올린 적은 없었다.”며 기뻐했다.

신한촌에서 위령재를 지낸 순례단은 다시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한 인물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재래시장에는 다양한 과일과 상품을 팔고 있었는데 우리네 60~70년대 오일장 같은 분위기였다. 재래시장 가까운 곳에는 큰 성당이 있는데, 성당 옆으로 재래시장이 형성된 셈이다. 판촉을 권장하는 방송이 나오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한국어로도 방송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국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생긴 변화인 듯하다.

러시아 하바롭스크 무명 용사의 묘를 참배한 한 순례단.

재래시장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거리에 잠수함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 잠수함은 세계2차대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던 ‘C-56 잠수함’으로 내부를 박물관으로 개조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었다. 옛 소련 태평양함대 소속으로 독일 군함 12척을 침몰시키는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그다지 크지 않은 잠수함은 내부도 비좁아서 ‘이곳에서 어떻게 생활을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수함에서 나와 독수리 전망대로 향했다. 독수리 조형물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바다와 함께 큰 다리가 멋있게 펼쳐진다. 바다에서 오른쪽으로 계속가면 북녘 땅인 나진과 선봉 지역이 나온다고 한다. 순례단은 점심공양 후에 해군박물관을 관람했다. 박물관 주변에는 구식 대포가 전시되어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니 각종 무기류와 지도, 군 지휘관의 사진과 흉상 등이 전시돼 있었다.

러시아 대통령궁을 둘러본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순례단.

이후 일정

이후 일정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날 저녁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12시간 타고 하바롭스크로 이동해 3일차를 보내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이동해 크레믈린·성모승천성당·대통령궁을 둘러봤다. 5일차에는 비행기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해 페테르고프 궁전·에르미타주 미술관(겨울궁전)을 관람했다. 독일 뮌헨으로 이동해 님펜부르크 궁전·BMW 자동차공장을 둘러봤으며, 7일차에는 오스트리아로 이동해 잘츠부르크에서 호엔잘츠부르크성과 모차르트 생가·미라벨 정원을 살펴봤다. 8일차에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국회의사당·대통령궁·슈테판대성당을 관람했으며, 다음날 쇤브룬 궁전을 구경한 후 모스크바를 경유해 귀국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승차를 앞둔 도원 스님을 비롯한 종의회 의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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