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적을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다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느냐고 물으면 다양한 대답이 나온다. 그 가운데 ‘고통 없이 건강하게 일생을 사는 것'이라는 대답과 ‘경제적으로 부유하여 원하는 모든 것들을 하면서 사는 것'이라는 대답이 대종을 이룬다.

넓게 볼 때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우리의 생각은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의 삶은 이것과는 다른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리고 변치 않기를 바라는 욕망 때문에 고통이 따른다고 하였다. 찰나찰나 바뀌는 현실 속에서 짧은 순간의 행복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이 중생들이기 때문에 변화 자체가 고통이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우리의 존재를 생각하면 두려움에 몸둘 바를 모르게 된다. 더구나 평소에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죽음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앞에 다가온다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고통의 원천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이 극에 달했을 때 사람들은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까지 저지른다. 요즈음 자살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오늘의 삶이 매우 고통스럽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죽음의 문제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고통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현실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죽음의 문제를 철저히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불교는 깨달음을 이루어 육도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공덕을 쌓아서 천상에 태어나거나, 많은 죄를 지어서 지옥에 태어나거나 죽은 다음에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다른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윤회인데 이러한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열심히 수행하고 깨달음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불자들은 누구나 극락왕생을 염원하고 있다. 사람이 죽어 다음 생을 받는데 자신이 지은 업대로 가기 때문에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곳에 가기를 서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극락세계는 부처님을 믿는다고 무조건 가는 세계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 생전에 극락에 갈 수 있는 공덕을 지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무진 공덕을 지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 이후에 다가올 다음 생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회향의 대상으로 인식될 것이다. 지은대로 가는 다음 생을 위해 살아생전에 열심히 공덕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미국 제2의 갑부인 워렌 버핏이 자기 재산의 85%인 37조원이란 거액을 미국 제1의 갑부인 빌게이츠 재단에 기부한 것이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이 땅의 갑부들이 그 재산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볼 때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에서 갑부들이 왜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리고 우리의 갑부들도 이것을 본받아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아름다운 회향을 꿈꾸는 사람에게 죽음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산다는 것과 결코 다른 말이 아님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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