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장애인관 재정립해
미래복지 주도해 나가자”

도쿄올림픽에 이어 열린 패럴림픽이 지난 9월 5일 일본 신주쿠 국립경기장에서 진행된 폐회식을 끝으로 13일간의 일정을 마쳤다. 패럴림픽에서 말하는 신체적 장애란 근육의 손상(하반신 마비와 사지마비·근육 영양장애·포스트소아마비증후군·척추파열), 수동적 운동장애, 사지결핍(절단과 사지 이상), 다리 길이의 차이, 짧은 신장, 긴장 과도, 운동 실조, 시각장애, 지적장애, 정신장애를 포함한다.

장애는 업, 잘못된 해석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장애를 어떻게 보셨을까? 여기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방귀희 선생이 지난 8월에 출간한 〈불교의 복지사상〉에 나와 있다. 스스로가 장애인인 방 선생은 KBS·EBS·BBS·BTN·복지TV에서 31년 동안 방송작가로 일해 오다 2012년 대통령 문화특별보좌관으로 청와대에서 근무하며 문화예술 실무를 쌓은 문화통이자 사회복지전문가로 문화와 복지를 융합시킨 ‘문화복지’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방 선생 저서 내용을 그대로 읽어 본다.

장애를 전생의 업(業)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불교의 인과론(因果論)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고대인도에서 발생한 윤회설에 대한 오해로 전생의 잘잘못이 현생의 모습을 결정한다는 숙명론적인 해석이 만연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불교는 인과와 업의 개념으로 민중에게 도덕을 가르쳐 왔기 때문에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사회에 전파시켰다. 불교의 인과설(因果說)은 통속적인 인과응보설이 아니므로 불교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해석이 사회적 편견을 만들었는데 그 편견의 가장 큰 피해자가 장애인이다.

이런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업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카르마(Karma)는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의식적인 행위로 다른 사람이나 생명체에 영향을 주는 행위가 업인 것이다. 업에는 몸(身), 입(口), 뜻(意)으로 짓는 세 가지 업(三業)이 있다. 따라서 자신의 의지가 들어가지 않으면 업이 아닌 것이다.

부처님은 인도를 들끓게 했던 극단적인 사상들[六師外道]과 맞서 종교적인 혁신을 일으켰다. 부처님은 무연무인론자(無緣無因論者)도 숙명론자도 아니었다. 전생의 업이 현재의 삶을 결정한다는 견해를 부정하였고, 동시에 과거 업의 영향이 현재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생각도 부정하였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의 극단을 거부하고 중도(中道)의 관점에서 업을 설(說)하였다.

그러니까 장애의 원인이 과거의 어떤 바르지 못한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숙명론적인 장애인관은 부처님이 타파하고자 하는 외도(外道)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애 원인의 90% 정도가 교통사고나 산업 재해 등으로 인한 후천적인 것에 원인이 있다는 통계(2017 장애인실태조사)에서도 장애를 숙명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업을 만드는 원인은 하나가 아니고 불특정 다수이다. 그것을 연(緣)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기 혼자 만든 업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고 했을 때 그것을 개인적인 업으로 결론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없는 세상이었다면 그는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업의 필연성은 외면적인 것, 즉 신체, 남녀의 구별과 같은 외적 생물학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업의 작용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사사끼 겐쥰). 불교는 인간적 생존에 관한 종교이기에 내적인 의지를 조건으로 해야 한다.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 출생을 묻지 말고, 단지 행위를 물어라
〈숫타니파타〉

이렇게 본다면 장애를 개인의 또는 한 가정의 업으로 볼 수 없다. 긍정적인 장애인관의 걸림돌이 되어 온 업 문제에 이런 해석이 납득이 된다면 우리 불교에서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장애인관을 정립시킬 수 있다.(pp.108∼110)

〈삽화=배종훈〉

불교장애인복지의 과제

불교장애인복지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약하다. 하지만 불교 경전 속에는 장애인과 장애인복지에 대한 이념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불경에 나타난 장애 명칭은 신체적 장애, 병약, 기형, 정신적 장애, 악업(탐욕·번뇌·집착·비방·질투·허언)이다. 현대적 장애 개념보다 훨씬 넓다. 인간의 잘못된 심리 상태까지 장애로 보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마음의 장애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장애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장애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삶의 하나의 조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불교장애인복지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제는 올바른 장애인관을 정립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불교장애인복지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첫째, 보시행이다. 보시라 함은 욕심을 거두고 자신의 것을 나누는 것을 뜻한다. 보시를 할 때는 준다는 마음 없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의 기부는 준다는 것을 너무나 강조하기 때문에 받는 사람들이 부담을 갖게 되고, 기부 활동이 선행으로 필요 이상의 칭찬을 하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낙인이 될 수 있다.

둘째, 복전행이다. 복전이란 행복을 키우는 땅이란 뜻이다. 장애인복지가 단순히 장애인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반대급부를 바라는 것 같지만 불교의 복전은 댓가를 예상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장애인복지는 복전임이 분명하다. 장애인복지가 발전해서 자립생활이 가능해지면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비용이 감소하고 장애인이 세금을 내는 국민으로 사회에 기여하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의 미래를 여는 열쇠는 장애인복지에 달려 있다고 하며 장애인복지에 박차를 가해 미국의 성장을 일구어냈다.

그래서 불교장애인복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첫째, 종단 차원에서 불교장애인복지 실천 체계를 갖추어야 하고,
둘째, 불교장애인복지에 대한 연구로 프로그램의 전문화를 꾀하고,
셋째, 민간 자원을 모아 장애인복지 기금을 마련하고,
넷째, 장애인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인적 인프라를 구축하고,
다섯째, 불교장애인복지 사상을 계몽하며 불교적 장애인관을 형성해가야 한다.

〈장애인 선교의 이론과 실제〉(이계윤, 1996)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불평등 조건으로서의 장애인으로 창세기 29:17-18에서 레아는 시각장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야곱의 선택에서 밀려나고 만다고 했고, 재앙을 받은 결과로 레아가 시각장애를 갖게 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죄인 또는 불결한 존재의 상징으로서의 장애인을 묘사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부인하며 순종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킬 때 장애인으로 비유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에는 장애인을 이렇게 부정적인 관점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다. 생명 전체로서의 장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장애, 변화된 증거로서의 장애인을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장애인을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 보고 있고,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장애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성경에는 장애인이 치유 받은 사건을 수없이 기록하며 그것을 기적이라고 하였다.

장애인은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구원을 해줘야 하는 선교의 대상으로 삼고 있어서 장애인복지에 적극적인 것이 바로 기독교 장애인관을 보편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에 따라 장애인관이 결정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이상적인 장애인관을 가질 수 있다. 우리나라는 불교적 이념이 근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전생의 죄를 운운하는 업보 윤회는 업 사상의 표피적인 면만을 가지고 유출한 왜곡된 논리이고,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장애인관을 형성할 수 있는 논리이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적인 모든 존재는 공간적·시간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생성·발전한다는 것이 연기론이다. 그래서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곧 나의 고통과 아픔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불교의 장애인관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지 않는 원융(圓融)사상을 가지고 있다.

긍정적인 장애인관의 걸림돌이 되어온 업은 공업(公業)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장애인계에서 장애인모델로 수용하고 있는 사회적 모델로서 해석이 가능하다. 장애는 개인적인 불능이 아닌 사회의 물리적·제도적 그리고 인식의 장벽이 만든 환경의 문제라는 것이다. 장애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바로 공업으로 장애인에게 편하도록 환경을 바꾸어주는 것이 바로 장애인 복지이다.

장애인이라는 낙인으로 차별하며 배제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장애인문제는 우리 사회가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공적인 의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pp.121∼124)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분도 시각장애인이었다. 카필라성 곡반왕의 아들인 아나율(阿那律, Aniruddha)은 어느 날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을 때 깜빡 잠이 들었다. 그것을 본 부처님이 아나율에게 ‘자네는 무엇 때문에 출가했는가?’라고 묻자, ‘지금부터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잠을 자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하고 불면으로 정진했다. 그러다 아나율의 눈에 병이 나자 부처님께서는 치료를 받도록 권했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정진하다가 완전히 실명하고 말았다.

〈삽화=배종훈〉

부처님은 실명한 제자에게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 실제 아나율이 바느질을 할 때 바늘귀를 부처님이 꿰어주셨다는 내용이 〈증일아함경〉에 나온다. 아나율은 육신의 눈을 잃은 대신 멀고 가까움, 안과 밖, 낮과 밤,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중생의 내세까지도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됐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나율을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고 칭했다.

부처님은 지적장애로 지능과 행동이 조금 늦어지는 사람도 제자로 받아들였다. 길에서 태어난 주리반득(周利槃得, Suddhipanthaka)은 3년 동안 수행했지만 글귀 하나를 제대로 못 외웠다. 어느 날 엉엉 우는 주리반득을 본 부처님이 그 이유를 묻자, 자기는 아무래도 부처님 법을 배울 수 없을 것 같다고 한탄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주리반득에게 “수행자들의 방을 청소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주리반득은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진심으로 열심히 청소하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께 “빗자루는 이 세상의 더러움을 쓸어버리고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 사람들도 지혜의 빗자루로 마음속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동료들에게 설법을 할 정도로 존경받는 수행자가 된 주리반득을 보고 바사익왕이 크게 놀라자 부처님은 “많이 배우는 것을 요하지 않습니다. 행하는 것이 으뜸입니다.”하고 말했다.

우다나야왕의 왕비 샤마바티는 불교에 깊이 귀의해 법회에서 하신 부처님 말씀을 시녀 웃다라를 통해 전해 들었다. 척추장애를 가진 웃다라는 머리가 매우 좋아서 법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줬는데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둘째 왕비 마간디야가 샤마바티를 시기해 내전에 불을 지르자 다른 시녀들은 모두 도망가기에 바빴으나 웃다라는 왕비를 구하려고 끝까지 불 속을 헤매다가 죽었다.

경전 속의 장애인은 이렇게 매우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대승(大乘)의 정신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다. 하화중생은 중생에게 불도를 널리 펴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려운 중생을 외면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사찰들은 부처님의 이런 정신을 받들어 갖가지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이 책은 불교의 복지사상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것이지만 장애인에 대한 문제를 불교적 관점에서 정면으로 파헤쳤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유자효
―시인. KBS 유럽총국장·SBS 이사·한국방송기자클럽회장을 역임했다. 시집 〈신라행〉·〈세한도〉·시집소개서 〈잠들지 못한 밤에 시를 읽었습니다〉·번역서 〈이사도라 나의 사랑 나의 예술〉을 펴냈다. 공초문학상·유심작품상·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사)구상선생기념사업회장, 지용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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