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순혈의 명마
길들임 받아들여 거듭나야”

청년 한 사람이 집을 나섰습니다.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집을 나선 것이지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을 그냥 두고서 몸만 빠져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아끼던 물건, 체취가 배어 있는 세간 그 모든 것을 놔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서는 이 청년. 눈치 채셨겠지요? 바로 싯다르타입니다.

싯다르타 출가를 지켜본 말

여느 청년과는 좀 다른 입장인 것이, 싯다르타는 한 나라의 왕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승계할 수 있었고, 명예와 부가 늘 함께 했습니다. 그런 자리를 포기한 채 그는 성을 나섰습니다. 그의 출가는 너무나 조용하고 신속하게 이뤄져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마부 찬나(Channa)와 애마 칸타카(Kanthaka)만이 곁을 지켰습니다.

훗날 붓다가 되실 이 분과 특별히 인간적인 정을 주고받은 동물이 있다면 말이 아닐까요? 싯다르타의 애마 칸타카는 싯다르타가 세속의 그림자를 지우는 그 마지막을 지켜보며 헤어지는 아픔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한 동물친구로 경전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싯다르타는 곧 말에서 내리며 등을 어루만지면서 ‘참으로 하기 어려운 일을 너는 잘해주었구나.’라고 말하였다.” 〈과거현재인과경〉

경전에서는 마부 찬나의 슬픔과 함께 애마 칸타카의 서러움을 절절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칸타카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 그만 절명했다는 내용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 애별리고의 정리를 품은 동물이 바로 우리, 말입니다. 어쩌면 그 때문에 부처님은 이후 어디를 가시든지 우리들 말과 관련해 수많은 법문을 베푸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처님이 조어장부인 이유

길들인다는 표현을 좋아하십니까?

인간이 태어난 그대로, 처음부터 품고 나온 그대로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면 이 ‘길들임’이라는 표현에 심하게 거부감을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불교에서는 길들인다는 표현이 종종 등장합니다. 불보살이 중생을 길들인다는 것인데, 이 표현은 ‘교화’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유능한 말 조련사 케시(Kesi)를 만났을 때 이렇게 물었습니다.

“케시여, 그대는 매우 유능한 말 조련사입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말을 길들입니까?”

“세존이시여, 저는 세 가지 방법으로 말을 길들입니다. 첫째는 온화하게 길들이고, 둘째는 혹독하게 길들이고, 셋째는 온화함과 혹독함을 번갈아 쓰면서 길들입니다.”

“케시여, 만약 그 세 가지 방법으로도 말이 길들여지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세존이시여, 그럴 땐 그 말을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가장 높은 분’이신데, 어떻게 사람을 길들이십니까?”

말 조련사 케시가 부처님에게 되묻습니다.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가장 높은 분’이란 말이 저 유명한 ‘조어장부(調御丈夫) 무상사(無上士)’이지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길들여지지 않으면 그 말이 쓸모없어서 죽여 버린다는 조련사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 말들은 섬뜩해집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부처님 말씀을 들으면 인간들도 우리처럼 섬뜩해지지 않을까요?

“케시여, 나 역시 중생을 세 가지 방법으로 길들입니다. 첫째는 온화하게 길들이니, ‘이것은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업이요, 그에 따르는 즐거운 과보’라고 일러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혹독하게 길들이니 ‘이것은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악업이요, 그에 따르는 괴로운 과보’라고 일러주는 것입니다. 셋째는 온화하고 혹독함을 번갈아 일러주면서 길들이니 ‘이것은 선업이고 저것은 악업이며, 이것은 선업에 따르는 즐거운 과보요, 저것은 악업에 따르는 괴로운 과보’라고 일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는 중생이 있다면 나 역시 죽여 버립니다.”

선업과 악업을 일깨워주면서 교화해도 그 마음이 열리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부처님도 말 조련사처럼 그를 죽여 버린다고 하니, 이것이 대체 무슨 말씀인가요? 케시도 깜짝 놀라 여쭙지요.

“아니, 세존께서는 결코 생명을 해치지 않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인다니요?”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여래는 생명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온갖 방법으로도 그 사람이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때 여래는 ‘이 사람을 일깨우지 말자. 이 사람을 가르치지 말자.’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도 ‘이 사람을 일깨우지 말자. 이 사람을 가르치지 말자.’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가르침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케시경’

이 말은, 부처님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나 말과 같은 모든 생명을 길들이기 위함인데, 부처님이 그 일을 거부할 때는 그 중생과 부처님과의 관계는 끝나는 것이요, 그는 세속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진리의 세계 속에서는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불교 입장이란 의미입니다.

이따금 이런 경전 문구를 접한 사람들은 “왜 길들이느냐? 뭣 때문에? 길들여서 자기들 말 잘 듣는 종으로 만들려고?”라며 벌컥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설명해볼까요?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숱한 사람들은 그냥저냥 살다가 한 생을 마치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남들처럼 살아가다가 문득 이런 의문을 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진실한 삶일까?’

‘조금 더 가치 있는 삶은 없을까?’

‘조금 더 행복해지려면, 이 행복이 오래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런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그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그리고 예민해지지요. 바로 그럴 때 누군가 한 마디 조언을 들려준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활짝 열립니다. 누구나 똑같은 야생의, 천연의 상태로 살아가는 삶에서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은 그 사람이 계발될 여지를 스스로 드러냈다는 뜻이며, 그럴 때 불보살의 가르침을 만나는 것을 경전에서는 ‘잘 길들인다면 황제가 탈 만한 최고의 말이 될 수도 있겠다.’고 조련사가 알아차리고서 길들인다고 비유합니다.

캄보디아의 왓프레아 프롬 랏(Wat Preah Prom Rath)은 1915년 지은 사원이다. 씨엠립을 방문하는 스님들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기 위해 건립됐다. 그 앞에 말 조형물이 서 있다.

명마의 조건

그냥저냥 살던 대로 살아가겠다면 불보살님도 뭐 어쩌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겠다는 바람을 품는다면 그에게는 이제 혹독한 조련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의 시간이며, 그 조련을 거쳐야 최고의 명마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명마란 어떤 조건들을 갖추어야 할까요? 명마라고 불리려면, 첫째는 민첩하고 재빨라야 하며, 둘째는 털의 빛깔이 완벽해야 하고, 셋째는 생김새도 출중해야 합니다.

이 조건을 진리의 세계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민첩하고 재빠르다는 것은 진지하고 철저하게 수행하여 완벽하게 괴로움을 털어버리고 해탈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털빛깔이 완벽하다는 것은 자기 혼자 해탈하는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도 진리를 잘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능력을 말합니다. 생김새가 출중하다는 것은 마음공부를 잘해서 세상의 훌륭한 스승이 되어 수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잡아함경〉 ‘양마경’

뿐만 아니라, 조련사에게 잘 길들여진 명마는 마부가 들고 있는 채찍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려 나갑니다. 물론 마부와 한 몸이 되어 있기에 어느 곳으로 달려야 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 좀 못한 말은 채찍이 털에 닿아야 마부의 뜻을 알아차리고 달려 나갑니다. 그보다도 좀 못한 말은 마부가 휘두른 채찍이 살갗에 닿아야 달려 나갑니다. 다시 이보다 더 못한 말은 살갗뿐만 아니라 뼈까지 때려야 달려 나가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영원할 줄 아는 세상 사람들. 그러나 어떤 이는 자기와는 상관없는 저 먼 곳 사람들의 생로병사 소식을 듣기만 해도 스스로의 문제로 여기고 깊이 사유합니다. 첫 번째 명마의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지요. 두 번째 사람들은 다른 이의 생로병사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느낌도 없다가 그들의 늙고 죽음을 목격하면 비로소 자신의 생사 문제라 여기며 사유합니다. 세 번째 사람들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늙고 병들고 죽는 모습을 보고서야 자신의 문제라 여기고 사유하며, 네 번째 사람들은 제 자신이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 덧없구나.”라며 사유합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파토다경’

부처님 눈에는 우리 모두가 순혈의 명마로 보이나 봅니다. 하지만 길들여지기를 거부한다면 부처님과의 인연도 거기서 끝이요, 진리의 세계에서도 작별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생로병사를 해결하는 일, 그것이 바로 길들여지는 일입니다.

“내버려둬, 난 그냥 살던 대로 살래.”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부처님의 길들임을 거부하니 멋져 보이기도 합니다만, 중생으로 태어나 중생으로 살다 죽고 다시 중생으로 태어나는 도돌이 삶을 떠올리자면, 이번 한 생, 부처님이라는 명조련사에게 잘 길들여지는 것도 꽤 괜찮지 않을까요? 명마로 거듭 나서 제왕의 말이 될지,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그냥저냥 살다 갈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태국 탐본 쿱 피만(Tambon Kut Phiman)에 있는 반 라이(Ban rai) 사원 앞에 구운 기와를 이용해 만든 말이 서 있다. 이 사찰은 존경받던 승려 루앙 포 쿤(Luang Pho Khun)이 살던 곳이다.

이미령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전번역가이자 불교대학 전임강사·북칼럼니스트이며, 경전이야기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붓다 한 말씀〉·〈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이미령의 명작산책〉·〈시시한 인생은 없다〉 등이 있다. 또 〈직지〉·〈대당서역기〉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